‘울고 싶어라’를 통해 성공적으로 재기한 사랑과 평화의 3집.
한국팝의사건·사고60년 (53) 이장희와 사랑과 평화
포크 가수가 작곡자로, 그룹 사운드가 연주자로 양쪽이 조우한 경우는 송창식과 ‘석기시대’, 그리고 이장희와 ‘사랑과 평화’가 있다. 지난 회에 이어 오늘은 후자를 살펴볼 차례다. 먼저 복습 삼아 송창식의 1978년작 <사랑이야/토함산> 뒷면에 기록된 연주자들을 살펴보자. 김석규, 조원익, 이호준, 배수연의 석기시대 이외에 이색적인 세션 뮤지션 이름이 보인다. 프랑코 로마노(키보드), 사르보(베이스)가 그들이다. 이탈리아인과 필리핀인으로 구성된 ‘프랑코 로마노 밴드’ 멤버들이었던 이들은 1980년대 초까지 한국에서 연주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명 ‘나미와 머슴아들’이라고 불린 팀의 그 ‘머슴아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당시 슬래핑(초퍼) 주법의 달인으로 통했던 사르보(음반 표기에 적힌 대로라면 본명은 Savatore Cantone)가 연주를 도와준 그룹이 또 있었다. 바로 사랑과 평화이다. 이남이나 송홍섭이 가요를 연주했다면 사르보는 팝송을 연주하는 무대에 섰다.
사랑과 평화가 누구인가. 말하자면, 이들은 지금 하나의 트렌드로서 각광받는 펑키, 퓨전 음악 같은 ‘뜨거운’ 음악을 만들어낸 한국 최초의 주역이다. 또한 현재까지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1세대 그룹 사운드 중 최장수 그룹으로 기록될 것이다. 어릴 때부터 기타 신동으로 불렸던 최이철이나, 1980년대 작편곡가로 활발히 활동한 김명곤 등을 위시해 한국 대중음악계를 빛낸 주역들이 있던 그룹이다. 또한 김광민이나 정원영 같은 퓨전 재즈의 대명사들도 이곳을 거쳐갔다.
진작부터 활동했던 이들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게 되는 것은 1978년 1집을 발표하면서부터다. 이는 그 배후에 든든한 후원자 덕분이기도 하다. 바로 이장희다. 가수 대신 비즈니스의 길을 선택한 이장희는 사랑과 평화를 눈여겨보고 자신의 프로젝트 중 하나로 낙점시켰다. 그리고 사랑과 평화 1집의 ‘한동안 뜸했었지’ ‘어머님의 자장가’, 2집의 ‘장미’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어요’ 등의 작곡으로 사랑과 평화의 전성기를 예비한 일등공신이 되었다. 활동을 규제받던 이장희의 본명 대신 다른 이름들(이원호, 이경애처럼 아들이나 부인 이름)이 사용되었지만. 물론 화려한 비행을 위한 날개를 달아준 것은, 끈끈하고 펑키하면서도 경쾌하고 익살스러운 분위기를 가미하거나(‘한동안 뜸했었지’처럼), 클래식 레퍼토리를 디스코와 펑키 버전으로 섭렵하는 등 사랑과 평화 본인들의 프로페셔널한 연주력과 탁월한 해석력이 아니겠는가.
이장희는 작곡에서 더 나아가 음악 사업으로 폭을 넓혔다. ‘락컴퍼니’라는 프로덕션(기획사) 같은 공간을 마련해 사랑과 평화를 비롯, 김현식, 최성원, 이승희, 이영재 등을 육성했다. 송창식이 원효로 스튜디오를 운영했던 것처럼, 이장희도 광화문의 ‘랩스튜디오’라는 녹음 스튜디오 운영도 병행했다. 좋은 장비와 시설을 갖춘 곳은 아니었기에 대개 정식 녹음은 더 좋은 스튜디오(서울 스튜디오 같은)에서 행해졌지만. 이장희가 떠난 뒤에도 이곳은 (송창식의 스튜디오가 그랬던 것처럼) 언더그라운드인들을 위한 아지트가 되었고, 김영동의 <삼포가는 길>(1982), 최성원이 기획한 프로젝트 <우리노래전시회 1>(1984), 김민기가 실질적인 프로듀서 역할을 한 <노래를찾는사람들 1집>(1984) 등이 태동하는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언제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은 왜 그렇게도 짧던가. 1980년 여름 ‘제2차 대마초 파동’은 이장희의 꿈을 와해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이장희는 이곳을 떠났다. ‘이장희 사단’의 한 주축이던 사랑과 평화도 상황은 마찬가지. 이후 시골로 내려간 멤버도 있었지만(이남이), 최이철은 송창식이나 김현식 등의 음반에서 최고의 세션 기타리스트로 활약했고, 김명곤은 ‘한국의 신쓰 팝’이라 할 나미의 ‘빙글빙글’ 등의 작곡을 비롯해 1980년대 많은 가수들의 음반에 편곡자로서 맹약했다. ‘한동안 뜸’하던 사랑과 평화는 1988년 ‘울고 싶어라’로 성공적으로 재기하게 된다.
글 최지선/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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