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이제 그만’과 ‘내 마음 당신 곁으로’가 실린 민해경의 귀국앨범.
한국팝의사건·사고60년 (63) 민해경과 박건호·이범희 콤비
데뷔와 동시에 스타덤에 오른 신인 여성 스타를 흔히 신데렐라에 비유한다. 진부하지만, 대중의 관심을 모으고 궁금증을 푸는 데 별다른 대안이 없는지 여전히 애용되는 표현이다. 하긴 지금도 수많은 (예비)가수들이 바늘구멍 같은 스타의 길을 통과하기 위해 절박한 노력을 기울이는 현실을 감안하면, 상투적이라 해도 신데렐라란 표현과 그 스토리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그 때문인지 데뷔와 동시에 스타가 되었다고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아니 오히려 이 편이 더 흔하려나.
민해경의 경우도 일찍이 성공했다고 오해받는 경우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민해경의 대표곡으로 손꼽는 ‘사랑은 이제 그만’ ‘그대 모습은 장미’ ‘그대는 인형처럼 웃고 있지만’ ‘보고 싶은 얼굴’ 등은 그녀의 가수 경력의 첫 자락에 있는 곡은 아니다. 물론 방금 열거한 곡들은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입까지 계속된 민해경의 전성기를 화려하게 장식한 곡들이지만, 전성기의 스타트를 끊은 ‘사랑은 이제 그만’(1986, 이세건 작사·작곡)은 그녀의 ‘재기작’이었다.
민해경의 데뷔는 그보다 훨씬 이전인 1980년이었다. ‘누구의 노래일까’를 들고 한국방송에서 주최한 서울가요제에 출전한 것. 비록 입상에는 실패했지만 데뷔 앨범을 통해 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을 일부 인용한 후속작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는 큰 인기를 모으며 롱런을 예고했다. 그런데 1983년 본인도 납득하기 어려운 루머로 인해 방송에서 하차해야 했고 결국 일본으로 건너가 속절없는 세월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누구의 노래일까’와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는 강렬한 음색과 댄스로 가요계를 주름잡던 전성기 때와는 사뭇 다르게 차분하고 서정적이었던 그녀의 초기 음악세계를 알려준다. 그런데 이 곡들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이 곡들이 작사가 박건호와 작곡가 이범희의 작품이었다는 사실이다. 정확히 말하면 1980년대 인기의 보증수표이던 박건호와 이범희 콤비의 첫 작품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콤비가 일군 첫 번째 빅 히트곡은 이듬해 인기 차트를 뒤흔든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겠지만, 민해경의 노래를 계기로 이들이 손발을 맞추기 시작했다는 점은 기억해둘 만하다.
원래 시인이었던 박건호는 1970~80년대 정상의 작사가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1970년대 초 박인희의 ‘모닥불’로 데뷔했고 이수미가 노래한 ‘내 곁에 있어주’, 장은아가 부른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 등 히트곡들을 낳았다. 하지만 그가 정상의 인기 작사가로 군림한 것은 조용필의 ‘단발머리’를 비롯해 나미의 ‘빙글빙글’ ‘보이네’ ‘슬픈 인연’, 한울타리의 ‘그대는 나의 인생’, 최진희의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 최혜영의 ‘그것은 인생’,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 등을 작사한 1980년대일 것이다. 그는 섬세하게 조탁한 가사로 대중적 인기는 물론 동료 음악인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박건호에 비해 조금 아래 연배인 이범희는 서른 즈음에야 작곡가로 데뷔했다. 서울대 음대 출신인 그는 밴드에서 기타 연주자로, 또 레코드사에서 편곡가로 활동하다 박건호의 권유로 작곡가 생활을 시작했다. ‘잊혀진 계절’로 대박을 터뜨린 이후에는 최고의 히트곡 제조기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1980년대 톱가수치고 그가 작곡한 곡을 한두 곡 안 받은 이들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또한 실력 있는 연주자들을 스튜디오 세션으로 기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발굴’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그가 김광석(기타), 변성룡(건반), 배수연(드럼) 등 신진 연주자들을 과감하게 녹음에 기용했다’는 박건호의 증언은 이범희가 음반 세션진을 풍성하게 한 데 일정한 구실을 했음을 증명한다.
1980년대 초 민해경, 박건호, 이범희가 빚어낸 작품은 그들 각각의 경력에서 정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뒤의 더 큰 성공에 가려지고 말 성질의 것은 아니다. 1980년대 주류 가요계의 빅뱅을 예시하는 것으로서, 또 스타 가수, 작사가, 작곡가로 풍미한 이들의 또 다른 모습으로서 되새겨볼 가치가 있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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