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돌의 1980년 데뷔 앨범.
한국팝의사건·사고60년 (66) 한돌과 신형원
지금 기준에서 보면 1980년대에는 없는 게 많았다. 인터넷은 물론 피씨통신도 없었고, 케이블방송은 남의 나라 얘기였으며, 지상파 티브이 방송이라고 해봐야 한국방송과 문화방송 두 곳뿐이었다(교육방송은 논외로 하자). 그래서 대중음악을 소개하고 홍보할 통로도 많지 않았다.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 여의도 방송가는 대중음악 홍보의 거의 유일무이한 통로였다는 얘기다.
하지만 방송국을 통하지 않고 히트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1980년대 중반 들국화로 대표되는 이른바 신촌 언더그라운드의 성공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그 시절 ‘여의도 바깥’의 홍보 통로로 음악다방을 빼놓을 수 없다. 1990년대 이후 거의 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음악다방이 도처에 산재해 있었고, 이곳에서 음악을 주재하던 디제이들은 네트워크를 갖고 있어서 만만찮은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특별한 홍보 없이 자연적으로 히트한다는 업계용어인 속칭 ‘자연뽕’으로 히트한 곡들 가운데는 음악다방 디제이들이 자주 소개해준(또는 작정하고 밀어준) 덕분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1984년 신형원이 부른 ‘불씨’와 ‘유리벽’도 음악다방 디제이들이 소개하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부질없는 가정을 하게 되는 경우다. 지난 회에 언급했듯, 신형원의 음반을 만든 제작자가 디제이 출신으로 뮤직디자인 대표인 서희덕(현 한국음원제작자협회장)이었다는 점은 당시의 정황을 암시한다. ‘불씨’와 ‘유리벽’은 음악다방에 자주 소개되어 좋은 반응을 얻었고 라디오를 통해 확고한 히트곡으로 올라섰다. 슬픈 사랑의 기억 때문에 사랑의 불꽃을 다시 태울 수 없음을 담담히 풀어낸 ‘불씨’와 모두 모른 척하고 아무도 깨뜨리지 않는 소통과 감정의 벽을 그린 ‘유리벽’의 가사, 신형원의 바이브레이션 없는 목소리와 서정적이고 담백한 곡조 모두 극적인 면은 없는 대신 맑고 순수한 이미지가 담뿍 묻어 있어 사람들에게 잔잔한 호소력을 발산했다. 정오차의 ‘바윗돌’이 그랬듯 신형원의 ‘불씨’ 역시 일부에서는 1980년 광주를 그린 곡으로 알려져 각별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했으며, 타이틀곡 ‘외사랑’은 절절하고 먹먹한 울림을 주는 곡으로 오래도록 컬트적인 인기를 누렸다.
신형원은 1987년 ‘개똥벌레’와 ‘터’로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개똥벌레를 소재로 우화적인 가사와 경쾌한 곡조를 지닌 ‘개똥벌레’, 이 나라와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벅찬 멜로디와 연주로 담아낸 ‘터’는 이 ‘얼굴 없는 가수’를 스타의 자리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댄스가요를 필두로 한 화려하고 자극적인 음악이 대중매체를 점령하던 시절 신형원의 곡들은 1980년대에 ‘경착륙’해버린 포크 음악이 발라드로 변형 수렴되지 않으면서 살아남은 빛나는 예외였다.
신형원의 입을 통해 널리 울려퍼진 곡들의 배후에는 한돌이 있었다. 한돌은 1970년대 후반 ‘참새를 태운 잠수함’에 참여한 후 1980년 ‘터’를 포함해 10곡을 담은 데뷔 음반을 내놓았지만 시장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 그 뒤 전담하다시피 신형원에게 만들어준 곡들이 크게 히트하면서 ‘얼굴 없는 작곡가’로 이름을 알렸다. 한영애가 부른 ‘여울목’과 ‘조율’, 구전가요처럼 알려진 ‘못생긴 얼굴’이란 곡도 그의 작품이다. 특히 못생기고 가난한 집의 아이를 화자로 삼은 ‘신랄한 동요’인 ‘못생긴 얼굴’은 대학가에 널리 구전되며 많은 대학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곡이다.
한돌은 사회성을 누락하지 않으면서 일상에서 길어낸 메시지를 잘 조탁한 한국어 가사와 서정적인 멜로디를 결합해 한국적 정서와 서민적 정취를 독특하게 갈무리한 음악인이었다. 그가 만든 곡들은 대중가요와 민중가요를 넘나드는 몇 안 되는 예외였다. 비록 그를 가수로 기억하는 사람은 극소수이지만, 작사·작곡가로서 그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김민기와 비교되곤 하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다.
한돌은 한국의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에서 가져온 영감과 소재를 노래로 빚어낸 장인이자 노래의 사회성과 민족성을 중시한 음악인이기도 하다. ‘홀로 아리랑’은 그 점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곡일 것이다. 1988년에 자신이 직접, 이듬해에는 서유석의 목소리를 빌어 녹음한 ‘홀로 아리랑’은 대중적으로 독도문제를 환기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서유석과 함께 독도사랑운동을 펼치면서 이를 뒷받침했다. ‘홀로 아리랑’은 정광태의 ‘독도는 우리 땅’과 함께 유이(唯二)한 독도 사랑 노래로 지금도 남아 있다.
글 / 이용우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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