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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보석 같은 하모니 들려준 사랑의 메신저

등록 2006-10-01 21:28

1986년에 발매한 해바라기의 3집 앨범.
1986년에 발매한 해바라기의 3집 앨범.
한국 팝의 사건·사고 60년 (68) ♬ 해바라기
1980년대 한국 팝에 대한 인상은 화려하다는 것이다. 비유하면 작은 거울을 표면에 무수히 붙인 미러볼이 ‘무도장’의 천장에 매달려 빙글빙글 돌아가며 반사광을 반짝거리는 이미지 같았다. 실제 1980년대는 나이트클럽이 만개했고 ‘총천연색’ 컬러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었다. 물론 이런 화려함이 지배적일지는 몰라도 ‘하나의’ 인상일 것이다. 그 반대편에 차분한 인상의 음악들도 엄존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댄스 음악의 화려한 군무와 함께 메탈 밴드가 내뿜는 강렬한 사운드가 좀더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던 1980년대 중반, 남성 2인조 듀엣 해바라기가 이른바 다운타운가부터 지지세를 높여갔다. 1970년대 말 4인조 해바라기(이정선, 이주호, 한영애, 김영미)를 기억하는 이들에겐 반갑지만 낯선 등장이었다. ‘구름 들꽃 돌 연인’ ‘뭉게구름’ 등 자연주의적 포크송과 맨해튼 트랜스퍼풍의 알싸한 하모니를 들려주던 오리지널 해바라기와 달리, 이 새로운 해바라기는 이주호라는 멤버의 계승 외에는 그다지 공통점이 없었다. 하지만 새 해바라기는 얼마 안 가 4인조 해바라기의 기억을 대중들의 머릿속에서 거의 지우고 ‘해바라기 = 이주호 + 1’이란 등식을 확고히 성립시킬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지금도 해바라기 하면 2인조 해바라기를 당연시할 정도다.

2인조 해바라기는 ‘이주호 + 1’의 구성으로 지금까지도 (계속 파트너가 바뀌며) 롱런 중이지만, 2인조 해바라기 하면 대중들이 가장 많이 떠올리는 라인업은 이주호와 유익종이다. 오리지널 해바라기 출신의 이주호와 1970년대 ‘그린 빈스’ 출신의 유익종은 1982년 의기투합한 뒤 이듬해 봄 어두운 카페 창가에 마주보고 앉아 있는 사진을 표지로 한 데뷔 앨범을 발표한다 (재미로 하는 말이지만 커버 사진에 담긴 다정한 모습은 요즘이라면 다르게 오해할 수도 있을 법하다). 이 데뷔 앨범의 수록곡들을 지금 새삼 들여다보면 누구라도 놀랄 것이다. ‘행복을 주는 사람’ ‘사랑의 시’ ‘갈 수 없는 나라’ ‘모두가 사랑이에요’ 등 해바라기의 대표적인 히트곡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흔히 주옥같다고 표현하는 이 레퍼토리들은 노래나 연주, 편곡 모두 크게 흠잡을 구석은 없었지만 대중적 호응을 불러내지는 못했다.

해바라기는 유익종이 빠지고 그 자리를 이광준이 대신한 뒤 발표한 2집을 통해서야 인지도와 인기를 모았다. 그런데 2집에서 히트한 곡의 다수는 ‘어서 말을 해’를 제외하면 1집에 이미 수록되었던 곡들(위에 열거한 곡들)을 재녹음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노래의 운명은 참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다. 그래도 2집 버전의 히트 원인을 궁리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2집 버전들은 요즘 유행하는 ‘포샵질’로 비유하면 채도를 올리고 콘트라스트를 높여서 다소 강한 색감과 좀더 쨍한 이미지로 보정한 것 같았다. 다시 말해 1집에 비해 신시사이저와 기타 연주가 또렷하게 들리는 데서 보듯, 편곡과 연주의 초점이 분명해졌다. 이호준(키보드), 이영재(기타) 등 세션진의 기여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해바라기는 2집을 계기로 라디오를 거쳐 티브이에서도 환영받는 위치에 이르렀다. 1985년 연말에는 KBS가요대상을 받으며 스타의 자리를 확인받았다. 이듬해 3집에서는 다시 이광준 대신 유익종이 들어왔는데, ‘내 마음의 보석상자’와 ‘사랑은 언제나 그 자리에’를 히트시키며 저력을 보여주었다. 연말 방송사 가요대상을 수상했음은 물론이다. 해바라기의 인기는 1989년 ‘사랑으로’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해바라기는 닐 영을 닮은 이주호의 음색과 아름다운 보컬 듀엣 하모니, 듣는 이를 따스하게 감싸는 멜로디와 서정성으로 1980년대 후반 높은 인기를 누렸다. 이들은 1980년대를 대표하는 듀엣일 뿐 아니라 당시 1970년대 통기타 포크를 계승한 몇 안 되는 존재로 평가받는다. 물론 포크를 발라드 연가로 속화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런 면이 없지는 않더라도, 하루가 다르게 강렬하고 자극적인 방향으로 변모해가던 가요계에서 오랫동안 분투하며 잔잔하고 차분한 서정성을 깊이 뿌리내린 점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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