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이 실린 김범룡 1집
한국 팝의 사건·사고 60년 (79) 김범룡과 ‘바람 바람 바람’
사람들은 언제나 새 얼굴을 기다린다. 한 시대를 평정한 슈퍼스타 조용필, 그의 아성에 도전했던 전영록, 대학에서 주류 연예계로 입성한 송골매가 1980년대 초부터 아성을 굳히게 되자 가요계에 새로운 얼굴이 등장하기를 고대했던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바람은 1980년대 중반쯤 실현되었다.
1985년 무렵, 최고의 슈퍼루키는 단연 김범룡이었다. “딴 따 따단”으로 시작하는 그의 데뷔곡 〈바람 바람 바람〉은 봄에 발표되어 여름까지 인기몰이를 했고, 〈그 순간〉과 〈겨울비는 내리고〉가 동반 인기를 얻으며 그의 상승세는 겨울까지 계속되었다. 이 노래의 인기를 분석하면서 ‘바람’을 화두로 한 그 무렵의 인기곡들을 도마에 올리며 ‘유행곡은 거의가 바람이 소재’라고 선언한 신문 기사도 있었는데, 화제를 만들기 위한 흥행성 기사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김범룡과 〈바람 바람 바람〉의 당시 인기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노래가 왜 인기를 얻었던 것일까? 이 노래를 직접 ‘겪은’ 사람들에게 “경쾌한 고고 리듬에 젊은층의 취향을 잘 간파한 가사가 강점”인 노래였다는 식의 소개는 불필요할 것이다. 이 노래를, 그리고 김범룡을 다크호스로 만든 건, 속삭이듯 읊조리는 창법, 전주와 간주의 인상적인 선율에 서려 있는 ‘구리지 않을 만큼의 뽕끼’가 아닐까.
이후에도 그는 꾸준히 앨범을 발표하며 인기를 얻었는데, 경쾌한 댄스풍 노래와, 애절한 발라드풍 노래를 안배하는 균형감각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규리, 양수경, 장덕, 이선희 등 여러 가수에게 노래를 작곡해주고, 녹색지대 등의 프로듀서를 맡는 등 여러 부문에 재능을 발휘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그가 작곡자 구실을 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놀라는 일도 많았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1985년 상반기께 “캠퍼스의 유행을 거쳐 방송가와 레코드가로 전파시킨 젊은 포크 가수들”을 소개한 한 신문에서 김범룡의 〈바람 바람 바람〉을 포크로 분류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포크’는 통상 많은 장르가 포괄되니 이런 분류가 잘못되었다고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마 김범룡이 ‘(충북대 서양화과 출신) 대학생 가수’라는 점이나, 가창과 작곡을 겸한 싱어송라이터라는 점에서 포크로 분류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가 “대학가에서 인기가 높은 대학생 가수”라고 해도, 캠퍼스 그룹사운드나 대학가에서 사랑받은 다른 ‘언더그라운드’ 포크보다는, 주류 취향의 음악에 가까웠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당시 김범룡의 라이벌은 누구였을까? 라이벌이란 게 자의적이기는 하지만, 〈약속〉 〈아이스크림 사랑〉 등에서 떨리는 (세칭 ‘염소형’) 목소리로 유명한 임병수와 (약간 시차가 있지만) 몇 년간 쌍벽을 이루었다고 기억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둘 다 ‘뉴 페이스’였지만, 김범룡이 고독한(반항아적?) 이미지였다면, 임병수가 차분한(모범생적?) 이미지였다고나 할까. 어쨌든 조용필이나 전영록 등에 반해 김범룡과 임병수는 참신한 새 얼굴인 셈이었다.
최지선/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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