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주년 지각앨범 내는 해바라기
30주년 지각앨범 내는 해바라기
해바라기의 이주호(52)씨가 음반을 다 만들어 놓고도 낼지 말지 고민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무리 음반시장이 몰락했다지만 천하의 해바라기까지…. 더구나 이번 음반은 “1년 지각한” 해바라기 데뷔 30주년 기념 음반이며, 지난 2003년 이후 햇수로 5년만에 나오는 음반 아닌가. 전후 사정이 궁금해 찾아간 서울 반포동 서래마을 해바라기 연습실. 손을 놓고 있을 줄 알았던 이씨는 파트너 강성운씨와 함께 한창 연습 중이었다.
1년 동안 만든 19곡 두 앨범에 나눠 담고 순회공연도 해요. 음반 시장이 어려워도 살아있는 음악을 만들면 사람들이 알아줍니다
지금 음악은 너무 편하게 가는 것 같아요. 가믓으로 느낄 수 있어야죠. 예술성·문학성이 없으면 음악이라고 할 수 없어요
“노래 하나 들어볼래요? 이번 앨범 타이틀곡 먼저 해볼께요. 제목은 ‘눈물이 날까봐’.”
반갑게 수인사를 나눈 그는 노래부터 시작했다. 뜻밖에 콘서트 같은 인터뷰가 진행됐다. 새 앨범에 실릴 노래 한 곡을 듣고 난 뒤, 질문 하나를 던졌다. 두툼하고 시커먼 그의 손가락이 지나간 기타 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청아한 소리를 냈다.
-음반은 다 만드셨나요?
“이달 말쯤이면 다 끝날 것 같아요. 시작한 지 1년 걸려서 지난해 10월에 다 만들었는데, 믹싱이 마음에 안 들어서 허물고 다시 했어요. 4인조 해바라기 데뷔 앨범을 1977년에 냈으니까 2007년이 30주년인데, 한해 늦어졌죠.” -음반 시장이 여의치 않아서 발매 여부를 고민했다고 들었습니다. “원래 19곡을 녹음했는데, 19곡을 다 내면 사람들이 들을 시간이 없다는 거에요. 어떤 친구는 요즘엔 음원이 중요하니까 한곡씩 내자고, 디지털 싱글로 내자고 했어요. 그런데 해바라기가 30주년 기념음반을 그런 식으로 내는 건 너무 타산적이고 시류에 편승하는 거라고 판단했어요. 그렇다고 더블 시디는 부담되고, 전부 내 자식 같은 곡들이라 어떤 걸 골라야 할지 망설이느라 오래 걸렸어요. 결국 파트 원, 파트 투로 나눠서 상반기와 하반기에 하나씩 음반을 내기로 했어요. 음반시장이 불황이라 낼까 말까 한 건 아닙니다.” 음악이 디지털로 소비되면서 음반 해체 현상이 나타났다. 음악은 엠피3 파일 형태로 한 곡씩 흩어져 있다. 아티스트의 땀과 눈물의 산물로서 음반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대하던 태도는 이제 확실히 과거의 것이 됐다. 그의 스태프 중 누군가 디지털 싱글을 건의한 것은 이런 상황을 고려한 결과일 터이다. -어떤 가수는 ‘이번이 마지막 시디’라며 음반을 내기도 했는데요. =살아있는 음악을 만들면 사람들이 느끼고 알아줍니다. 저는 기계로 음을 만들지 않고 직접 연주하죠. 이번 음반은 라이브음반처럼 테이크원(한번에 녹음을 끝내는 방식)으로 갔어요. <사랑으로> 음반을 소장하고 계신 400만 팬 여러분이 30주년 기념 음반을 한 장씩 사 주시면 그것을 토대로 또다른 음악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해바라기를 진정 원하신다면 말이죠.” -노랫말을 들으니 지금도 연애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연애는 늘 하죠. 사랑하지 않으면 너무 삭막해요. 사랑의 대상이 연인이라고 생각하면 사랑의 애틋함이 솟아나와요.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른 대상으로 들릴 수도 있죠.” 그는 국민가요가 된 ‘사랑으로’(89년)의 탄생 배경을 소개했다. 어느 환경미화원 일가족 4명이 배가 고파 동반자살을 기도했다가 막내딸만 죽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마음이 아파 1분30초만에 가사를 써내려 갔다. 노랫말에 맞춰 기타를 쳐보니 “눈물이 확 쏟아지더라”고 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그때 컵라면 하나가 100원이었거든요.” ‘사랑으로’의 노랫말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주리라”는 그의 따뜻한 심성의 발로였다. -교회에 다니십니까? =우리 집안이 불교 집안인데 저만 초등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녔어요. 거기서 피아노 소리에 매혹됐죠. 우리 어머니가 김자경(전 김자경오페라단 단장)씨의 원산 루시여고 1년 후배에요. 메조 소프라노였는데, 이대 음대 가려고 서울로 가려다 친구가 일러바치는 바람에 내려오지 못하고 거기서 선생을 했죠.” -음악이 없었다면 무엇을 했을 것 같습니까? “음악이 없으면 난 죽었지. 상상도 할 수 없어요.” -예전에 티브이에 나왔을 때는 과묵하다는 느낌이었는데, 의외로 말을 잘 하시네요. “(내 음악을 좋아해주니까) 친하게 느껴졌나봐요. 원래 숫기가 없어요, 내가. 사람들 앞에서는 아직도 쑥스러움을 많이 타요.” -항상 듀엣으로, 비슷한 형식으로만 노래하는 것 아닌가요. “오케스트라 하고도 연주해 봤고, 록 공연도 해봤어요. 퍼커션(타악기)이나 스트링(현악기)만으로 구성된 공연도 해봤구요.” -파트너가 계속 바뀌는 이유는 뭡니까? “하다보면 (파트너가) 혼자 활동하고 싶어할 때도 있고, 마음이 변하기도 하죠. 내가 성격이 나빠서 그렇다는 소리가 들리기에, 같이 했던 사람들하고 한 번씩 더 같이 했어요. 기회를 한 번씩 더 준 거죠. 나라고 왜 실수가 없었겠습니까? 그래도 이 친구(강성운)는 99년에 만나서 10년째 같이 하고 있잖아요.” -요즘 유행하는 음악은 얼마나 들으시나요. “많이 듣는 편이죠. 너무 편하게 가는 것 같아요. 삶과 죽음에서 오는 아픔, 절실히 와닿는 무엇이 결여된 것 같아요. 우리 대학 다닐 때는 철학이 필수였는데, 요즘엔 선택과목이라면서요. 공부를 도구로 삼으니까 시야가 좁아지죠. 잔재주로 남의 것 복사해서 자기 것인양 할 수는 있겠죠. 이제 춤(댄스음악)은 끝났잖아요? <텔미>가 국민가요면 알만한 거 아닙니까? 가슴으로 느낄 수 있어야죠. 창작성, 예술성, 문학성이 없으면 음악이라고 할 수 없어요. 자기 생각을 시로 표현하려면 공부를 해야지.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르잖아요.” 요즘도 그는 “아침에 눈을 뜨면 시집을 들춘다”고 했다. 가장 좋아하는 시를 묻자 김용택 시인의 ‘단 한번의 사랑’이라며 끝까지 암송을 했다. “이 세상에/나만 아는 숲이 있습니다/꽃이 피고/눈 내리고 바람이 불어/차곡차곡 솔잎 쌓인/고요한 그 숲길에서/오래 이룬/단 하나/단 한번의 사랑/당신은 내게/그런/사랑입니다.”
글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이달 말쯤이면 다 끝날 것 같아요. 시작한 지 1년 걸려서 지난해 10월에 다 만들었는데, 믹싱이 마음에 안 들어서 허물고 다시 했어요. 4인조 해바라기 데뷔 앨범을 1977년에 냈으니까 2007년이 30주년인데, 한해 늦어졌죠.” -음반 시장이 여의치 않아서 발매 여부를 고민했다고 들었습니다. “원래 19곡을 녹음했는데, 19곡을 다 내면 사람들이 들을 시간이 없다는 거에요. 어떤 친구는 요즘엔 음원이 중요하니까 한곡씩 내자고, 디지털 싱글로 내자고 했어요. 그런데 해바라기가 30주년 기념음반을 그런 식으로 내는 건 너무 타산적이고 시류에 편승하는 거라고 판단했어요. 그렇다고 더블 시디는 부담되고, 전부 내 자식 같은 곡들이라 어떤 걸 골라야 할지 망설이느라 오래 걸렸어요. 결국 파트 원, 파트 투로 나눠서 상반기와 하반기에 하나씩 음반을 내기로 했어요. 음반시장이 불황이라 낼까 말까 한 건 아닙니다.” 음악이 디지털로 소비되면서 음반 해체 현상이 나타났다. 음악은 엠피3 파일 형태로 한 곡씩 흩어져 있다. 아티스트의 땀과 눈물의 산물로서 음반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대하던 태도는 이제 확실히 과거의 것이 됐다. 그의 스태프 중 누군가 디지털 싱글을 건의한 것은 이런 상황을 고려한 결과일 터이다. -어떤 가수는 ‘이번이 마지막 시디’라며 음반을 내기도 했는데요. =살아있는 음악을 만들면 사람들이 느끼고 알아줍니다. 저는 기계로 음을 만들지 않고 직접 연주하죠. 이번 음반은 라이브음반처럼 테이크원(한번에 녹음을 끝내는 방식)으로 갔어요. <사랑으로> 음반을 소장하고 계신 400만 팬 여러분이 30주년 기념 음반을 한 장씩 사 주시면 그것을 토대로 또다른 음악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해바라기를 진정 원하신다면 말이죠.” -노랫말을 들으니 지금도 연애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연애는 늘 하죠. 사랑하지 않으면 너무 삭막해요. 사랑의 대상이 연인이라고 생각하면 사랑의 애틋함이 솟아나와요.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른 대상으로 들릴 수도 있죠.” 그는 국민가요가 된 ‘사랑으로’(89년)의 탄생 배경을 소개했다. 어느 환경미화원 일가족 4명이 배가 고파 동반자살을 기도했다가 막내딸만 죽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마음이 아파 1분30초만에 가사를 써내려 갔다. 노랫말에 맞춰 기타를 쳐보니 “눈물이 확 쏟아지더라”고 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그때 컵라면 하나가 100원이었거든요.” ‘사랑으로’의 노랫말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주리라”는 그의 따뜻한 심성의 발로였다. -교회에 다니십니까? =우리 집안이 불교 집안인데 저만 초등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녔어요. 거기서 피아노 소리에 매혹됐죠. 우리 어머니가 김자경(전 김자경오페라단 단장)씨의 원산 루시여고 1년 후배에요. 메조 소프라노였는데, 이대 음대 가려고 서울로 가려다 친구가 일러바치는 바람에 내려오지 못하고 거기서 선생을 했죠.” -음악이 없었다면 무엇을 했을 것 같습니까? “음악이 없으면 난 죽었지. 상상도 할 수 없어요.” -예전에 티브이에 나왔을 때는 과묵하다는 느낌이었는데, 의외로 말을 잘 하시네요. “(내 음악을 좋아해주니까) 친하게 느껴졌나봐요. 원래 숫기가 없어요, 내가. 사람들 앞에서는 아직도 쑥스러움을 많이 타요.” -항상 듀엣으로, 비슷한 형식으로만 노래하는 것 아닌가요. “오케스트라 하고도 연주해 봤고, 록 공연도 해봤어요. 퍼커션(타악기)이나 스트링(현악기)만으로 구성된 공연도 해봤구요.” -파트너가 계속 바뀌는 이유는 뭡니까? “하다보면 (파트너가) 혼자 활동하고 싶어할 때도 있고, 마음이 변하기도 하죠. 내가 성격이 나빠서 그렇다는 소리가 들리기에, 같이 했던 사람들하고 한 번씩 더 같이 했어요. 기회를 한 번씩 더 준 거죠. 나라고 왜 실수가 없었겠습니까? 그래도 이 친구(강성운)는 99년에 만나서 10년째 같이 하고 있잖아요.” -요즘 유행하는 음악은 얼마나 들으시나요. “많이 듣는 편이죠. 너무 편하게 가는 것 같아요. 삶과 죽음에서 오는 아픔, 절실히 와닿는 무엇이 결여된 것 같아요. 우리 대학 다닐 때는 철학이 필수였는데, 요즘엔 선택과목이라면서요. 공부를 도구로 삼으니까 시야가 좁아지죠. 잔재주로 남의 것 복사해서 자기 것인양 할 수는 있겠죠. 이제 춤(댄스음악)은 끝났잖아요? <텔미>가 국민가요면 알만한 거 아닙니까? 가슴으로 느낄 수 있어야죠. 창작성, 예술성, 문학성이 없으면 음악이라고 할 수 없어요. 자기 생각을 시로 표현하려면 공부를 해야지.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르잖아요.” 요즘도 그는 “아침에 눈을 뜨면 시집을 들춘다”고 했다. 가장 좋아하는 시를 묻자 김용택 시인의 ‘단 한번의 사랑’이라며 끝까지 암송을 했다. “이 세상에/나만 아는 숲이 있습니다/꽃이 피고/눈 내리고 바람이 불어/차곡차곡 솔잎 쌓인/고요한 그 숲길에서/오래 이룬/단 하나/단 한번의 사랑/당신은 내게/그런/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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