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후과정 준비중 돌연 귀국
음악에 ‘올인’한 첫번째 앨범
용산을 위한 ‘평범한 사람’ 등
가진것 없는 이들에 바친 노래
# 귀국
지난 2월, 비행기에서 내리는 루시드 폴(조윤석)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달랐다. 이제 다시 스위스로 나갈 일은 없다. 고국으로 완전히 돌아와 전업 음악인의 길을 걷기로 한 것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카드 한 장을 던진 셈이죠.”
서울 삼청동에 숙소 겸 작업실을 얻고 새 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따지고 보면, 이전 앨범들은 모두 다른 일을 하면서 만든 것이다. 인디 밴드 ‘미선이’ 앨범(1998)은 대학생 시절에, 1인 밴드 루시드 폴 1집(2001)은 병역특례 산업체에서 일하면서, 2집(2005)과 3집(2007)은 스위스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만들었다. 온전히 앨범 작업에만 몰두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축구에서 교체 선수로만 뛰다가 처음으로 90분 풀타임 선발 출장한 기분이랄까요? 음악인으로서 처음 1집을 내는 기분이 들어, 부담감이 컸어요. 이제 음악만 하겠다고 큰소리치며 카드를 던졌는데 뒤집어보니 시시한 패더라, 이러면 안 되잖아요?”
# 출국
2002년 12월, 조윤석은 스웨덴행 비행기에 올랐다. 스웨덴 왕립 공대에서 학생 겸 연구원을 모집한다는 글을 인터넷에서 우연히 보고 지원한 것이다. 서울대 화학공학과 재학 시절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그였다. “군 복무를 마치고 갑자기 공부가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러던 차에 기회가 생겼고, 미련 없이 유학길에 올랐죠.” 2004년 스위스 로잔공대로 옮겨 박사 과정에 들어갔다. 공부와 연구를 하며 짬짬이 앨범도 냈다.
지난해 7월 박사 학위를 받은 뒤, 교수 권유로 박사 후 과정을 준비하던 무렵이었다. 그해 9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학회에 갔다. 호텔 방에 있는데, 갑자기 연설을 들으러 가기가 싫어졌다. ‘내가 왜 이러지?’ 브라질 삼바 음악이 흐르는 이어폰을 꽂고 종일 시내를 쏘다녔다. 불쑥 들어간 시디(CD) 가게에서 이탈리아 프로그레시브·아트 록 밴드 뉴트롤스와 라테에미엘레 앨범을 발견했다. 10대 때 처음 음악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밴드들이었다. 생각이 늘고 고민이 깊어졌다. 문득 과학자의 ‘논리’가 아닌 ‘직관’이 머리를 때렸다. 한국에 돌아가 음악을 해야 한다고.
주변에서 다들 말렸다. 가족은 물론, 소속사 대표조차 “음반 시장도 불황인데, 유희열·김동률과 붙어서 이길 자신이 있느냐”며 손을 내저었다. 스위스에서 만난 동료 가수 이적은 “네가 돌았구나”라고 했다. 그래도 그는 끝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드러난 패
루시드 폴의 카드가 지난 10일 뒤집혔다. 4집 <레미제라블>이 발매된 것이다. 기타·피아노 등 소박한 악기 편성에, 따뜻하면서도 어딘지 쓸쓸한 그의 목소리는 여전하다. 여기에 한결 더 유려하고 여유로워진 선율과 깔끔해진 편곡이 돋보인다. 유희열은 새 앨범을 듣고 “한국에 이런 음악인이 있어 기쁘다”고 극찬했다. 예스24 등 주요 음반 판매 차트에선 이틀 만에 1위에 올랐다. 루시드 폴의 이번 패는 꽤나 강력해 보인다.
앨범을 꿰뚫는 콘셉트는 같은 이름의 빅토르 위고 소설에서 따왔다. 극 중 단 한 명도 행복한 사람이 없어 보인다는 데서 착안해, 가진 게 없는 사람들, 죽어간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단다.
“나는 갈 곳이 없었네. 그래서 오르고 또 올랐네.” ‘평범한 사람’은 용산 참사를 모티브로 삼았다. ‘레미제라블’은 프랑스가 아니라 우리의 불행한 과거를 노래한 곡이다. 신념을 지키려고 싸우다 죽어간 남자의 ‘파트1’과 그를 보내며 슬퍼하는 여자의 ‘파트2’가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가난한 그대, 날 골라줘서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오늘 이 하루도.” 유학 시절 즐겨 먹던 생선을 화자로 내세운 ‘고등어’는 오늘을 열심히 사는 서민들에게 바치는 송가다.
루시드 폴은 19일 부산, 24~26일 서울, 31일 대구에서 잇따라 공연을 한다. “내년에는 작은 무대에서 기타·피아노·목소리만으로 차린 소박한 공연도 하려고 해요. 티켓값도 더 싸게 하고요. 지친 이들이 제 노래로 위안을 얻었으면 좋겠어요.” 공연 문의 1544-1555.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사진 안테나뮤직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