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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장인정신을 찾습니다

등록 2012-01-24 19:12

서정민의 음악다방
당사자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재판은 꽤 흥미로웠다. 피고 박진영(위 사진) 쪽과 원고 김신일(아래) 쪽은 오선지 악보를 스크린에 비추고 음악을 틀어가며 표절 의혹에 대한 날선 공방을 벌였다. 피고 쪽 전문가 참고인으로 나온 김형석 작곡가는 직접 키보드를 연주하며 표절로 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지난 18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455호 법정에서 벌어진 광경이다.

작곡가이자 가수인 김신일은 지난해 역시 작곡가이자 가수인 박진영을 상대로 저작인격권, 저작물작성권 등을 침해당했다며 1억1000만원 상당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박진영이 작곡한 드라마 <드림하이> 사운드트랙 수록곡 ‘섬데이’가 자신이 작곡한 애쉬 2집 수록곡 ‘내 남자에게’를 표절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후렴구 네 마디는 누가 들어도 비슷하다고 느낄 정도로 닮았다. 해당 마디 악보를 비교해 봐도 코드 진행이 같고 멜로디와 리듬도 차이가 거의 없어 90%가량 일치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날 피고 쪽 참고인으로 나온 김형석 작곡가도 유사성을 인정했다.

박진영(위)과 김신일(아래). 한겨레 자료사진
박진영(위)과 김신일(아래). 한겨레 자료사진
하지만 표절을 판단하는 근거는 유사성이 아니다. 작정하고 베꼈는지 여부가 관건인데, 이는 온전히 작곡가 자신만이 아는 영역이다. 설사 표절했다 하더라도 당사자가 이를 순순히 인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유사성 정도와 전문가 감정 등을 종합해 표절 여부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표절을 가리는 일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신일 쪽의 핵심 주장은 “우연히 멜로디나 코드 진행이 닮을 수는 있어도 두 요소가 동시에 닮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며 “‘섬데이’는 ‘내 남자에게’를 참조하지 않고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곡”이라는 것이다. 반면 “이 정도의 코드 진행과 멜로디는 작곡가들이 흔히 쓰는 재료이므로 독창적이라고 볼 수 없다”며 “박진영 또한 흔한 재료를 조합하다 우연의 일치로 비슷한 결과물이 나온 것”이라는 게 박진영 쪽의 핵심 주장이다.

이제 쟁점은 ‘독창성’으로 모아진다. 김형석 작곡가는 “두 노래 모두 독창적이라고 볼 수 없다”는 의견을 밝혔다. 판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동그라미 그림을 그대로 베끼면 저작권 침해가 아닙니다. 그런데 해당 노래의 네 마디도 독창성이 없으니 그대로 베껴도 보호받을 수 없다는 얘기인가요?” 피고 쪽 변호인은 “그게 우리 기본 입장”이라고 답했다.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음악의 역사는 길다. 웬만한 코드 조합, 멜로디, 리듬은 이미 나올 대로 나왔다. 그런 익숙한 재료 중에서도 새로운 조합을 찾아 세상에 없던 노래를 창조하는 게 작곡가의 몫이다. 그렇게 만든 곡에 자부심을 갖고 독창성과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야말로 작곡가에게 요구되는 ‘장인정신’이 아닐까. 온전히 새로운 것을 찾기 힘들다는 이유로 스스로도 독창성이 없음을 인정하는 곡을 공산품 찍어내듯 조립하는 현실은 대중음악의 상업적 속성을 십분 고려한다 해도 씁쓸하다.

판사는 “예술의 영역을 법의 잣대로 재량해야 하는 상황이 참으로 어렵다”며 다시 한번 당사자 간 조정을 당부했다. 마지막 조정마저 불발로 끝나면 다음달 8일 선고공판이 열린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누군가는 크게 상처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대중음악판 자체가 받을 상처가 더 깊고 아플 것 같다. 대중문화팀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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