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위아래사람들
직업이 낯설다. 무용 연출가. 너그럽게 헤아려도 나라 안에는 대여섯 명이다. 이재환(41)씨다.
안무가가 있는데 웬 무용 연출가냐고? 긴 설명이 필요하다.
“연극을 했어요. 개인적으로 무용을 연출해달란 의뢰가 들어왔죠. 작품 제작만큼 먼저 왜 이 작품을 해야하는지 함께 논쟁하는 게 연극에선 중요했습니다. 사회, 문화적으로 왜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고민했죠. 그런데 무용 쪽은 그게 없는 것 같았어요.”
이씨는 무용 작품에서 특히 공간의 의미, 주제의식, 방향 따위를 안무가와 함께 설정해간다. 안무가의 눈 하나가 되는 것이다.
몸과 텅빈 무대 솔직함 반해
12년째 무용과 인연 이어가 그렇다. 연극인 출신이다. 무용과 인연을 맺은 1993년 즈음, 한참이나 대중화가 되지 않은 무용의 속사정을 꼬집다가, 이젠 자신도 여전한 무용 현실의 ‘공범’이 됐다. 온전히 무용판에서 사는데다 아내도 무용수다. 무용 연출가라는 직함이 지금보다 더 낯설었으며 일년에 한 작품 정도를 하던 때와 소극장 작품까지 한 달에 하나 정도를 올리는 지금, 12년의 세월이 가로지른다. “왜 대중화가 안 됐냐고요? 폐쇄적이라 그래요. 다른 이의 작품 가운데 제 것보다 나은 2~3개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부족한 7~8개에 대해서만 얘기해요.” 사제로 맺어지는 계보나 패거리주의의 배타성이 남다르다. “무용해서 돈 벌겠다는 생각도 적죠. ‘돈’은 곧 관객의 기호, 눈을 의식한다는 건데 그게 없으니 자기 세계에만 갇혀버려요. 그래서 작품은 더 어려워지기만 합니다.”
영문학을 공부한 이씨는 대학졸업 뒤 바로 서울예대 졸업생이 주축이었던 극단 교실에 들어갔다. 연극이 하고 싶었다. 서울예대 편입을 포기한 대신 연극과 수업을 청강했다. 학구적인 극단으로 이름 높았던 교실의 회원들은 이씨가 동문인 줄로 알았을 정도다. 희곡으로 중앙일간지의 신춘문예(94년)를 통해 등단을 했을 만큼 그의 삶은 연극 중심이다. 무용적 요소를 연극에 접목하고 싶은 욕심이 많지 않았다면 이쪽엔 발 들이지 않았을지 모른다. 당시 연극계에 팽배했던 사실주의와 ‘말’에 대한 회의만 없었어도. “언어란 게 그래요. 전날 술을 먹고도 어느 정도 감정이입만 되면 관객을 적당히 속일 수 있어요, 그게 연극인데, 춤은 반면 솔직했습니다. 말이 아닌 몸의 솔직함이 대단히 매력적이었죠.” 텅 비어 있는 무대 또한 솔직하긴 마찬가지. 빈 공간을 창작자가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작품은 널을 뛴다. 무용수로서 춤을 추다 일정한 시기가 지나 승진하듯 안무를 하게 된 이나, 그래서 동작 개발에만 에너지를 쏟는 안무가들이 관객과 소통하기란 쉽지 않다. 안무가들이 주로 연출을 하고 트레이너가 동작을 탐구하며 조율이 이뤄지는 외국과 다르다. “안무가를 혼란스럽게 하는” 게 제 몫이란다. 그간 50여 작품에서 안무가는 이씨 때문에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김매자의 <심청>(03년), 인천시립무용단의 <월인천강지곡>(02년), 김은희의 <산해경>(04년) 등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전통춤으로 고전발레 <백조의 호수>를 옮겨보자는 이단적 발상도 그래서 나왔다. “창작자가 앞다퉈 장기공연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작품은 차치하고 극장 수나 재정 여건 탓만 하는 이들을 대신해 누구도 ‘대중화’의 숙제를 풀어주지 않는다. “정부의 사후지원작 대상이 되려고 세 차례 공연을 하는 의무방어전”식 창작은 결국 제자들, 지인들만 소비한 채 끝나고 만다. 자신과 제 식구들, 한참을 채찍질한 뒤에야 무용을 변명한다. “‘아프다’란 한 마디를 몸으로 표현해내는 일은 어렵고, 당연히 그 몸짓을 다 이해할 순 없어요. 주제보다 몸짓을 그냥 받아들이세요. 등을 막 돌릴 때 떨어지는 무용수의 땀방울, 멈춰 서있는데 팔등의 작은 근육이 파닥거릴 때처럼 아름다운 순간은 없어요. 그것만 발견해도 무용은 재미있을 겁니다.”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12년째 무용과 인연 이어가 그렇다. 연극인 출신이다. 무용과 인연을 맺은 1993년 즈음, 한참이나 대중화가 되지 않은 무용의 속사정을 꼬집다가, 이젠 자신도 여전한 무용 현실의 ‘공범’이 됐다. 온전히 무용판에서 사는데다 아내도 무용수다. 무용 연출가라는 직함이 지금보다 더 낯설었으며 일년에 한 작품 정도를 하던 때와 소극장 작품까지 한 달에 하나 정도를 올리는 지금, 12년의 세월이 가로지른다. “왜 대중화가 안 됐냐고요? 폐쇄적이라 그래요. 다른 이의 작품 가운데 제 것보다 나은 2~3개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부족한 7~8개에 대해서만 얘기해요.” 사제로 맺어지는 계보나 패거리주의의 배타성이 남다르다. “무용해서 돈 벌겠다는 생각도 적죠. ‘돈’은 곧 관객의 기호, 눈을 의식한다는 건데 그게 없으니 자기 세계에만 갇혀버려요. 그래서 작품은 더 어려워지기만 합니다.”
영문학을 공부한 이씨는 대학졸업 뒤 바로 서울예대 졸업생이 주축이었던 극단 교실에 들어갔다. 연극이 하고 싶었다. 서울예대 편입을 포기한 대신 연극과 수업을 청강했다. 학구적인 극단으로 이름 높았던 교실의 회원들은 이씨가 동문인 줄로 알았을 정도다. 희곡으로 중앙일간지의 신춘문예(94년)를 통해 등단을 했을 만큼 그의 삶은 연극 중심이다. 무용적 요소를 연극에 접목하고 싶은 욕심이 많지 않았다면 이쪽엔 발 들이지 않았을지 모른다. 당시 연극계에 팽배했던 사실주의와 ‘말’에 대한 회의만 없었어도. “언어란 게 그래요. 전날 술을 먹고도 어느 정도 감정이입만 되면 관객을 적당히 속일 수 있어요, 그게 연극인데, 춤은 반면 솔직했습니다. 말이 아닌 몸의 솔직함이 대단히 매력적이었죠.” 텅 비어 있는 무대 또한 솔직하긴 마찬가지. 빈 공간을 창작자가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작품은 널을 뛴다. 무용수로서 춤을 추다 일정한 시기가 지나 승진하듯 안무를 하게 된 이나, 그래서 동작 개발에만 에너지를 쏟는 안무가들이 관객과 소통하기란 쉽지 않다. 안무가들이 주로 연출을 하고 트레이너가 동작을 탐구하며 조율이 이뤄지는 외국과 다르다. “안무가를 혼란스럽게 하는” 게 제 몫이란다. 그간 50여 작품에서 안무가는 이씨 때문에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김매자의 <심청>(03년), 인천시립무용단의 <월인천강지곡>(02년), 김은희의 <산해경>(04년) 등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전통춤으로 고전발레 <백조의 호수>를 옮겨보자는 이단적 발상도 그래서 나왔다. “창작자가 앞다퉈 장기공연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작품은 차치하고 극장 수나 재정 여건 탓만 하는 이들을 대신해 누구도 ‘대중화’의 숙제를 풀어주지 않는다. “정부의 사후지원작 대상이 되려고 세 차례 공연을 하는 의무방어전”식 창작은 결국 제자들, 지인들만 소비한 채 끝나고 만다. 자신과 제 식구들, 한참을 채찍질한 뒤에야 무용을 변명한다. “‘아프다’란 한 마디를 몸으로 표현해내는 일은 어렵고, 당연히 그 몸짓을 다 이해할 순 없어요. 주제보다 몸짓을 그냥 받아들이세요. 등을 막 돌릴 때 떨어지는 무용수의 땀방울, 멈춰 서있는데 팔등의 작은 근육이 파닥거릴 때처럼 아름다운 순간은 없어요. 그것만 발견해도 무용은 재미있을 겁니다.”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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