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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LP 음악을 듣는 건 추억과 역사를 나누는 거죠”

등록 2012-09-24 20:18

서보익(41)씨
서보익(41)씨
외국 명반엘피 역수출 서보익씨
팝음악 듣던 중학생, 엘피 마니아로
영국·미국 곳곳 돌며 ‘중고’ 사모아
1달러에 산 음반, 지금은 1천달러
시디 명반 엘피로 만들어 미국 수출
“느리고 불편하지만, 그만큼 소중”

팝 음악이 좋아 카세트테이프를 모으던 중학생 소년이 엘피(LP)로 눈을 돌린 건 고등학생이 되면서였다. 용돈을 모으고 아르바이트를 해 매주 한장씩 꼬박꼬박 사 모았다. 서보익(41)씨는 그렇게 엘피 마니아가 됐다.

군대에 다녀온 뒤로는 수입 원판에 눈이 갔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1990년대 초반 당시 돈으로 10만원 넘는 것도 있었다. 알아보니 외국에선 1달러에도 파는 판이었다. 수입상이 폭리를 취한 것이다.

‘비행기 삯을 들여서라도 외국에 가서 잔뜩 사오는 게 낫겠다’고 여긴 그는 영국으로 갔다. 1년간 어학연수를 하며 엘피 500여장을 샀다. 한국에 돌아와 대학을 마치고는 미국 뉴욕으로 유학을 떠났다. 전공인 디자인을 공부하면서도 틈만 나면 미국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중고 엘피를 사 모았다.

“비행기 격납고를 빌려 엘피 몇 백만장을 보관하는 수집가도 있었어요. 그런 곳을 찾아다니는 거죠. 한번은 길거리에서 아마도 유품인 듯한 판을 장당 1달러에 파는 거예요. 존 콜트레인(재즈 색소폰 연주자) 판을 샀는데, 지금 시세가 1천달러는 할걸요?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음반을 만나면 보물이라도 찾은 기분이죠.”

유학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올 당시 부산항에 도착한 짐을 본 세관 공무원이 눈을 치켜뜨고 특별조사를 했다고 한다. “이삿짐의 90%가 수천장에 이르는 판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죠.”

2000년대 들어서는 미국 경매 사이트 ‘이베이’를 통해 판을 사고팔았다. 집에 쌓아둔 판이 많을 때는 1만장 넘기도 했으나, 지금은 절반 이상 팔았다고 그는 말했다. “1년 넘게 손 안 대는 판은 파는 게 나아요. 듣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2007년 서씨는 ‘키오브’라는 회사를 세우고 음반 제작에 나섰다. 먼저 워너·소니·유니버설 등 3대 음반사의 몇몇 명반을 ‘엘피 미니어처’로 만드는 일을 맡았다. 자신이 보유한 엘피 원본을 토대로 시디(CD) 케이스를 엘피 케이스 축소본으로 재현했다. 결과물은 음반 애호가들 사이에서 제법 화제가 됐다.

서씨는 이번에 아예 엘피를 제작했다. 90년대 당시 시디로만 제작된 명반을 세계 최초로 엘피로 만드는 작업에 나선 것이다. 지름 12인치 판이 턴테이블에서 분당 도는 속도에서 따온 ‘플레이 33 ⅓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엘피 3장을 출시했다. 재즈 거장 찰리 헤이든과 팻 메시니가 호흡을 맞춘 <비욘드 더 미주리 스카이>, 파코 데 루시아, 알 디 메올라, 존 매클로플린 등 기타 명인 3인방의 합작품 <더 기타 트리오>, 제프 벡 등 최정상급 연주자들이 대거 참여한 존 매클로플린의 앨범 <더 프로미스>다.

지난 18일 <한겨레>에서 만난 그는 “저작권을 가진 음반사를 설득한 뒤, 직접 시디 케이스를 확대 디자인해 엘피 케이스를 만들고, 독일의 공장에 주문해 엘피 판을 만드는 데 여섯달 넘게 걸렸다”고 했다. 세월이 지나도 판이 휘지 않도록 두꺼운 180g 무게의 엘피 음반으로 제작하고, 케이스를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자르고 풀칠했다. 음반당 500장씩 제작했는데, 국내에선 몇몇 온·오프라인 매장(문의 02-525-7538)에서만 판매하고, 외국으로도 역수출할 계획이다. 11월에는 2차로 허비 핸콕, 마이클 브레커, 찰리 헤이든의 엘피를 발매할 예정이다.

“느리고 불편한 엘피가 요즘 세태를 거스르는 측면이 있죠. 하지만 빠르고 편리한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열심히 일해서 번 돈과 쉽게 번 돈은 그 가치가 다르잖아요. 정성과 노력을 들여 듣는 엘피 음악은 참 소중하게 다가와요. 음악뿐 아니라 따뜻한 추억과 역사를 함께 나누는 순간이거든요.”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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