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정중화(왼쪽)씨와 함께 연주하고 있는 정성조씨
정성조, 2번째 유학 뒤 무대복귀
‘국내 재즈스승’ 색소폰 연주자
대학교수 퇴임뒤 미국서 만학
지휘수업에 음반녹음까지 열정
“배움 자체에 큰 즐거움 느껴”
아들과 함께 클럽연주활동 시작
‘국내 재즈스승’ 색소폰 연주자
대학교수 퇴임뒤 미국서 만학
지휘수업에 음반녹음까지 열정
“배움 자체에 큰 즐거움 느껴”
아들과 함께 클럽연주활동 시작
“전에 매주 이 무대에 서다가 1년 반의 공백기를 가진 뒤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반겨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지난 11일 밤 서울 청담동 재즈 클럽 ‘원스 인 어 블루문’ 무대에 선 정성조(67)가 말문을 열었다. 재즈 색소폰 연주자이자 한국 대중음악계의 ‘큰 스승’인 그는 지난 1년 반 동안 어디로 사라졌던 걸까?
중학교 시절 처음 색소폰을 잡은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60년대 중반 미8군 악단에서 본격적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이 당시 악단의 기타리스트였다. 서울대 작곡과에서 공부한 그는 1970년대 들어 국내 최초의 브라스 록 그룹 ‘정성조와 메신저스’를 결성하고 연주 활동을 했다.
“나이트클럽에서 매일 연주하다 문득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평범한 연주인으로 머물겠구나.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엔 클럽 사장들이 건달 계통이어서 일을 그만두겠다는 얘기를 쉽게 꺼내기 힘들었지만, 어렵게 담판을 지었죠.”
1979년 미국 보스턴 버클리음대로 무작정 떠났다. 공부를 하다가도 뉴욕 한인 술집에서 연주하며 학비를 벌었다. 휴학하고 로스앤젤레스로 넘어가 돈을 벌기도 했다. 꼬박 4년 만에 졸업했다. 국내 음악인이 버클리음대를 졸업한 건 최초였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뮤지컬 음악감독 일을 주로 했다. 영화 <깊고 푸른 밤> <공포의 외인구단> 음악을 맡기도 했다. 1995~2005년 케이비에스(KBS) 관현악단장을 맡고 <열린음악회> <빅쇼> 음악감독도 지냈다. 그는 맥주 광고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재즈 한다고 하면, 모나고 자존심 센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고정관념이죠. 저는 모두 다 같은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재즈 음악인도 음악을 좀 다양하게 해야 해요. 중국집 가면 짜장면도 먹고, 짬뽕·볶음밥도 먹을 수 있는 것처럼요.”
2005년 그는 1989년 당시 창립 멤버로 교편을 잡았던 서울예대 실용음악학과로 돌아갔다. 학과장을 맡아 후배 양성에 매진했다. 2011년 여름 정년퇴임한 그는 훌쩍 미국 뉴욕 퀸스칼리지로 떠났다. 재즈를 또 공부하러 간 것이다.
“예전에 그곳에서 유학하던 아들을 만나러 갔다가 음악대학원장인 마이클 필립 모스먼을 만났어요. 50대에 벌써 거장 반열에 오른 트럼펫 연주자인데, 음악적인 면은 물론 인간적인 면도 굉장히 훌륭한 거예요. 같이 얘기하는 게 즐거워 아예 유학까지 가서 꾸준히 교류하자고 마음먹은 거죠.”
1년 반 동안 재즈뿐 아니라 클래식 오케스트라 지휘 수업도 청강했다. 그곳 연주자들로 구성된 재즈 빅밴드(10인조 이상의 대편성 악단) 편곡과 지휘를 맡아 음반까지 녹음해 왔다. 재즈 작곡 석사 학위는 덤이다. “황혼 유학으로 특별히 뭘 더 얻었다기 보다는 배움 자체의 즐거움을 느꼈어요. 그걸로 충분하죠.”
지난 2일 귀국한 그는 다시 정성조 퀸텟(5중주단)으로 클럽 연주 활동을 시작했다. 퀸텟에는 아들인 트롬본 연주자 정중화(42)도 참여하고 있다. “내가 운전면허가 없어서 아들이 나를 태우고 다녀요. 자식이 마흔 넘으면 부모와 멀어진다는데, 우린 이렇게 붙어다니니 얼마나 운이 좋아요. 내가 아들과 학교 동문이 된 셈인데, 왠지 7살배기 손자까지 3대가 동문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뱃속에서부터 들은 게 재즈니까. 하하~.”
무대에서 아들과 함께 ‘블루 보사’, ‘걸 프롬 이파네마’ 등을 연주하는 그의 얼굴에서 배어나온 행복한 기운이 선율을 타고 관객들 얼굴로까지 번져갔다.
글·사진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정성조(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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