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레코드판’으로 통했던 엘피(LP·Long Playing Record)는 보물처럼 귀했다. 카세트테이프보다 비쌌을 뿐만 아니라 노래 하나 듣는 데도 훨씬 더 많은 품을 필요로 했다.
우선 종이 커버에서 비닐을 꺼낸다. 거기서 알판을 조심스레 꺼낸다. 절대로 손이 알판 넓적한 면에 닿아선 안 된다. 오로지 둥그런 가장자리만 건드리는 신공으로 무사히 턴테이블까지 옮겨야 한다. 잠깐! 턴테이블에 올리기 전에 티끌 하나 묻었을까 살펴야 한다. 정전기제거 스프레이를 뿌리고 부드러운 헝겊으로 닦는 일도 잊어선 안 된다.
듣고 싶은 곡에 바늘을 올리고 물러서 앉고 나면, 그야말로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음악에만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그토록 공들여 튼 음악인데, 어찌 건성으로 들을 수 있겠나. 말하자면, 엘피는 음악 들을 준비 과정부터가 음악감상의 일부인 셈이다.
하지만 지금 내겐 턴테이블이 없다. 모아둔 엘피도 그냥 책장 어딘가에 숨어 있다. 보통은 스마트폰으로, 가끔은 시디(CD)로 음악을 듣는다. 손쉽게 음악을 접할 수 있어서인지, 음악을 대하는 마음가짐 또한 그만큼 가벼워진 것도 같다.
미국, 영국 등을 중심으로 열리는 ‘레코드 스토어 데이’라는 행사가 있다. 4월 셋째주 토요일이 되면 음악팬들이 새벽부터 음반 가게에 줄을 선다. 폴 매카트니, 롤링스톤스, 데이비드 보위 같은 거장부터 신인과 인디 음악인들까지 이날만 특별히 판매하는 한정판 엘피 음반을 내놓는다. 사라져가는 독립 음반 가게를 후원하는 행사다. 6회째인 올해 행사 주간에는 미국에서만 24만장 넘는 엘피가 팔려나갔다.
미국과 영국의 엘피 시장은 지난해 폭발적 성장세를 이뤘다. 미국 내 음반 판매량을 공식 집계하는 닐슨 사운드스캔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에선 중고 음반 말고 새로 제작된 엘피만 460만장이 팔렸다. 전년보다 19% 늘었다. 집계를 시작한 1991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93년 판매량은 고작 30만장이었다.
많이 팔린 목록도 흥미롭다. 1위 잭 화이트, 3위 멈퍼드 앤 선스를 비롯해 블랙 키스, 본 이베어, 아델 등 최근 발매된 엘피가 10위권을 독식하다시피 했다. 10~20대를 중심으로 한 인디 음악팬들이 엘피 구매를 주도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흐름은 국내에서도 다르지 않다. 지난해 경기도 김포에선 ‘엘피 팩토리’라는 엘피 공장이 8년 만에 부활했다. 패티 김, 김광석, 들국화, 조동익, 투에이엠, 나얼, 이승열 등 다양한 음악인들이 엘피를 발표했다. 최근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조용필 19집 <헬로>도 곧 엘피로 발표될 예정이다.
왜 엘피가 부활하는 걸까? 디지털 시대 음악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환경에 대한 반작용으로 음악팬들의 소장욕구가 더욱 강해지고 있고, 그걸 가장 잘 충족하는 매체가 엘피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25일 서울 논현동 플래툰 쿤스트할레에선 엘피를 사고파는 축제 ‘서울 레코드 페어’(사진)가 열린다. 이 행사만을 위한 한정판 엘피는 물론 턴테이블까지 판다고 하니, 거기 가면 분명 ‘지름신’이 강림할 것 같다. 어라! 그런데 그날 토요 당직이다. 이거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서정민 문화부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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