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지아트센터 하우스매니저 이선옥씨가 안내방송을 할 때 쓰는 마이크를 잡고 활짝 웃고 있다. 그는 작품의 특성을 반영한 재치 넘치는 방송 멘트로 유명하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문화‘랑’] 나도 문화인
⑥ 공연장 하우스매니저 이선옥씨
⑥ 공연장 하우스매니저 이선옥씨
공연 진행·관객 안내 총괄 14년째
작품 특성 녹여낸 재치 한마디로
만족도 높이고 배려하는 마음 살려
남들 쉴 때 일하니 “열녀비 세울 판” 지난 3월 서울 역삼동 엘지아트센터에서 뮤지컬 <레베카>를 볼 때다. 1막이 끝나고 중간 휴식시간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관객 여러분, 극의 절반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대체 레베카는 언제 나오는 걸까요? 15분 뒤 2막에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순간 객석에서 웃음보가 ‘빵’ 터졌다. 제목이 될 만큼 중요한 인물인 레베카가 다른 등장인물들의 입으로만 회자될 뿐 무대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극의 특성을 안내방송에 녹여낸 것이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때는 “지금 이 순간 나만의 욕심으로 휴대폰이나 카메라를 작동하고 계신 건 아닌가요?”라는 안내방송이 흘렀다. 뮤지컬의 대표곡 ‘지금 이 순간’을 활용한 것이다. 이런 식의 재치 넘치는 안내방송을 듣고 나면 관객들은 궁금해한다. ‘대체 누가 하는 걸까?’ 그 주인공은 하우스매니저 이선옥(45)씨다. 하우스매니저는 공연장에서 관객 서비스, 공연 진행 등을 총괄하는 자리다. 안내원들을 통솔하며 객석·로비·매점·화장실 등 관객들이 움직이는 공간 모두를 챙긴다. 국내에선 1999년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이 처음 도입한 이후 점차 번져 지금은 전국 공연장에서 50여명이 하우스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이씨는 2000년부터 엘지아트센터 하우스매니저를 맡아왔다. 올해 14년차로, 현직 가운데 최고참이다. 학창 시절 오락부장을 도맡으며 끼를 발산한 그는 방송사 피디의 꿈을 안고 대학 방송연예과에 진학했다. 방송을 잘 만들려면 연극과 공연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졸업 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공연예술아카데미에 다녔다. 1994년 예술의전당 인턴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뒤로 공연기획사를 거쳐 방송사 현장진행요원(FD)으로도 일했다. 1990년대 후반 야구장에서 ‘700 서비스’ 전화로 경기를 실시간 중계하고 대형마트에서 안내방송을 했던 경험은 그에게 ‘방송감각’을 키워줬다. 이씨가 처음부터 튀는 방송을 한 건 아니다. 공연장의 엄숙한 분위기에 맞춰 정형화된 문구만 되풀이했다. 그러다 2002년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보고 나가는 관객들에게 안내방송으로 한·일 월드컵 경기 결과를 전하면서 처음 틀을 깼다. “승전보를 듣고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며 안내방송에서 이런 걸 해도 괜찮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는 말했다. 본격적으로 안내방송에 색깔을 넣기 시작한 건 2007년부터.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시작 전 이렇게 방송했다. “(뮤지컬의 배경인) 16세기 스페인의 지하감옥에는 휴대폰도 카메라도 없었습니다. 매너를 지키는 여러분이 바로 레이디이며 기사들입니다.” 이후 모든 안내방송에 작품의 특성을 녹여냈다. 이를 위해 작품을 미리 공부하는 건 필수다. 그렇다고 대본을 따로 준비하지는 않는다. 열쇳말 몇개를 적은 종이를 들고 즉흥적으로 한다. 2010년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때는 유독 어린이 관객이 많았다. 일부 산만한 아이들 때문에 불편을 호소하는 관객도 적지 않았다. 그는 극중 대사를 응용해 이런 방송을 했다. “<빌리 엘리어트>는 온 가족이 함께 보면 좋은 공연이지만 결코 아동극은 아닙니다. 어린이나 학생단체를 동반하신 보호자나 선생님께서는 공연 중 어린이들이 ‘숨겨진 내면의 끼를 발산하거나 원초적 본능을 끌어내서’ 다른 관객에게 방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신경써주시기 바랍니다.” 객석을 웃음바다로 만든 이 방송이 입소문을 타면서 다른 공연장에서도 안내방송을 이런 식으로 해보라는 지시가 내려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느 하우스매니저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언니 때문에 일이 늘었다”고 웃음 섞인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안내방송을 이렇게 하는 건 적잖은 돈을 내고 온 관객들이 공연을 최대한 즐기고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거예요. 웃음으로 관객들의 긴장을 풀어주는 효과도 있지만, 휴대전화나 카메라로 다른 이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서로 배려했으면 하는 바람도 담은 거죠.” 그는 이른바 ‘진상’ 관객을 만나면 힘이 쭉 빠진다고 했다. “늦게 와서는 공연 진행 상황과 관계없이 무작정 들어가겠다는 관객, 앞사람 앉은 키가 커서 제대로 못 봤다며 환불해달라는 관객, 안내원에게 반말하며 함부로 대하는 관객, 공연 내내 사진 찍는 관객 등 별별 분들이 다 있어요. 제발 서로를 배려하는 문화가 자리잡았으면 좋겠어요.” 공연에 대한 무한애정으로 행복하게 일하고 있지만, 하우스매니저가 마냥 화려하고 즐겁기만 한 직업은 아니라고 그는 힘줘 말했다. 하루 7~8시간씩 서서 일해야 하는데다, 공연 정리를 마치고 퇴근하려면 보통 자정이 넘는다. 주말이나 명절 연휴에도 쉬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1년에 300회 넘는 공연을 챙기면서도 정작 그 공연을 제대로 본 적은 한번도 없다. “남들과 생활 주기가 안 맞아 데이트 한번 하기도 쉽지 않네요. 그래서 아직 혼자인가봐요. 만약 결혼하고 애를 키웠다면 이 일을 놓았을지도 모르죠. 동료들은 공연장 앞에 제 이름을 새긴 열녀비를 세워야 한다는 농담도 해요. 호호호~.”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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