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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마음까지 힐링된다는 발레 후배들 말 들을 때 보람”

등록 2013-08-29 19:37수정 2013-08-29 21:01

발레리노 출신의 국립발레단 재활트레이너 고일안씨가 26일 낮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국립발레단 재활 치료실에서 한 단원의 다리 상태를 살피며 테이프를 붙이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발레리노 출신의 국립발레단 재활트레이너 고일안씨가 26일 낮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국립발레단 재활 치료실에서 한 단원의 다리 상태를 살피며 테이프를 붙이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문화‘랑’] 나도 문화인
⑮ 무용수 재활트레이너 고일안씨
잘나가던 국립발레단 발레리노
2007년 연습중 다쳐 눈물의 은퇴
‘후배들 돕자’ 생각에 재활 공부
경험 살려 맞춤 치료에 심리상담도
“춤은 못 추지만 춤사랑은 영원”

28일 개막한 <돈키호테>의 막바지 연습이 한창인 지난 21일 국립발레단 연습실. 주인공 ‘키트리’ 역을 맡은 발레단 수석무용수 김지영과 ‘바질’ 역 이동훈이 동작을 맞추는 모습을 연습실 한켠에서 긴장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국립발레단의 재활트레이너 고일안(39)씨다.

“공연이 임박했을 때 무용수들의 부상 가능성이 커요.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무리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부상에 대비해 한시도 연습실 근처를 떠날 수 없어요.” 무용수들이 연습이나 공연에서 부상을 당하면 바로 달려가 마사지나 응급처치를 하는 ‘재활 트레이너’인 고씨는 공연 때문에 여름휴가까지 반납한 터다. 지금은 이렇게 ‘대기’하는 것이 일상이지만, 그도 2007년까지는 국립발레단 소속 발레리노였다.

“2007년 <뮤자게트> 연습 중 회전 동작을 하다 무릎 인대 다섯군데가 파열됐어요. 두달 넘게 병원에 입원하면서 제 경력은 끝이 났습니다.” 몇달 동안 잦은 통증에 시달렸던 무릎을 ‘괜찮겠지’라며 방치한 결과는 참혹했다. 당시 세살배기 아이를 둔 가장이었던 고씨는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막막했죠. 머잖아 은퇴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아무 대책 없이 15년 가까이 해온 발레를 그만두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발레단의 유망 솔리스트였던 아내도 2001년 <스파르타쿠스> 연습 도중 공중 리프트 상태에서 추락해 큰 부상을 입고 결국 은퇴했던 터라 부상에 대한 그의 충격은 더욱 컸다.

퇴원 이후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차츰 그는 자신처럼 부상당한 무용수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졌다. 이듬해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전문무용수지원센터 제1기 직업전환프로그램의 도움으로 재활트레이너 과정을 이수하며 그는 인생 2막을 꿈꿀 수 있었다. “이론을 배우는데 의학 용어부터 운동역학, 생리학, 해부학, 영양학까지, 어휴…,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더라고요.” 이론 과정을 끝내고는 1년 남짓 병원에서 실습을 했다. 청소 등 잡일을 도맡고 실무를 배우느라 잠잘 시간조차 없었다고 한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그는 ‘재활 지식과 필요성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은퇴하지 않았을 텐데’라는 아쉬움과 ‘후배들 중엔 나 같은 사람이 더이상 없도록 돕자’는 생각으로 이겨냈다. 이후 고씨는 2009년 국립발레단에 취업해 국내 유일의 ‘발레리노 출신 무용수 재활트레이너’가 됐다.

실무가 시작되자 발레리노 출신이란 점이 강점이 됐다. 무용수 재활은 일반 스포츠 재활과 다르기 때문이었다. 무용수들과 스포츠 선수는 부상 부위가 서로 다르다. 무용에서도 남녀 무용수가 주로 부상을 입는 부위도 차이가 있다. 도약을 많이 하는 무용수들에겐 남녀 모두 족저근막염(발바닥 섬유조직에 발생하는 염증성 질환)이 자주 생긴다. 여기에 토슈즈를 신는 발레리나들은 발등에 스트레스성 골절이 잦고, 다리를 높이 드는 동작과 허리를 뒤로 꺾는 동작이 많아 허리와 골반에 고질적 통증을 느끼게 된다. 반면 발레리노들은 리프트 동작 때문에 어깨가, 회전점프 때문에 정강이와 무릎부상이 많다. “부상 당시 상황만 듣고도 부상 부위와 정도를 유추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무용수들이 ‘미사일 하다 떨어졌다’고 하는데, ‘미사일’은 도약 뒤 점프해 60도 각도로 2회전 하는 동작을 뜻하는 은어예요. 무용수가 아니면 알 수 없죠.”

테이핑 방식도 특별하다. 연습에 지장이 없게 최대한 적게 테이핑해야 할 때도 있고, 오히려 근육을 잡아주기 위해 많이 해야 할 때도 있다. 세심한 동작을 하는 무용수 특성상 발뒤꿈치나 복숭아뼈를 피해 테이핑해야 할 때도 있다. 또 무용수 각각의 근육 특징을 고려해 ‘맞춤형 테이핑’을 해야 한다.

“무용수들은 부상을 당해도 숨기는 경우가 많아요. 공연에 지장을 주기 싫어서, 또는 배역에서 밀려날까봐 참는 거죠. 과거엔 웬만한 부상은 참는 걸 미덕으로 여기는 풍조까지 있었어요.” 그는 부상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잘못된 풍토가 무용수들의 은퇴 시기를 앞당기는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실제 국내에는 40대 이상 무용수들이 거의 없다. “파리오페라발레단, 아메리칸발레시어터, 볼쇼이발레단 등 세계 유수 발레단에는 물리치료사, 마사지사, 테이핑 전문가 등 세분화된 전속 재활트레이너들이 있어요. 부상은 초기 치료가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국내 사설발레단들은 재정도 열악하고 인식도 부족해 전속 재활트레이너를 고용하지 않아요.” 국립발레단에서는 치료와 재활 트레이닝을 요하는 무용수들이 보통 하루 15명, 많게는 40명까지 생긴다. 크고 작은 부상과 함께하는 것은 무용수들의 숙명인 셈이다.

후배들의 몸을 치료하다 보니 자연스레 심리상담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후배들은 선배인 그에게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는다. “간판스타였던 (김)주원이는 저를 제일 많이 찾는 후배였어요. 연습량이 많으니 부상도 잦았죠. 어느날 주원이가 ‘오빠는 육체를 넘어 마음까지 힐링 해준다’고 했는데, 보람과 감동에 울컥했죠.”

고씨는 요즘 부상을 예방하는 ‘균형 잡힌 근육발달 운동’을 주 3회씩 후배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의 최종 목표는 ‘무용수 전문 재활센터’를 세우는 것. “모든 무용수들이 언제나 편하게 찾아갈 수 있는 센터를 짓고 싶어요. 저처럼 발레리노 출신 재활트레이너도 많이 키우고요. 비록 춤은 출 수 없지만, 발레에 대한 제 짝사랑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아요.”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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