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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마음 움직였단 말 듣고 싶어, 팬은 많지 않아도 돼”

등록 2013-12-05 20:29

엠시 메타(왼쪽)와 나찰, 두 명이 뭉친 힙합 듀오 가리온이 한국 힙합과 함께 걸어온 15년을 농축한 ‘데뷔 15주년 기념 앨범’(오른쪽 작은 사진)을 발표했다. 이들은 “한국 힙합의 외형이 성장했지만, 가짜가 판치는 부조리는 더 심해졌다”고 쓴소리를 했다. 피브로사운드 제공
엠시 메타(왼쪽)와 나찰, 두 명이 뭉친 힙합 듀오 가리온이 한국 힙합과 함께 걸어온 15년을 농축한 ‘데뷔 15주년 기념 앨범’(오른쪽 작은 사진)을 발표했다. 이들은 “한국 힙합의 외형이 성장했지만, 가짜가 판치는 부조리는 더 심해졌다”고 쓴소리를 했다. 피브로사운드 제공
[문화‘랑’] 힙합 1세대 가리온의 ‘외길 15년’
티브이 속 아이돌이 랩을 하고 거리엔 힙합 패션이 정착하고 ‘디스’나 ‘스웨그’라는 말이 친숙해진 시대. 힙합은 이제 확실한 메이저 문화가 된 듯 보인다. 진짜로? “가짜 진짜는 가짜!”라 일갈하는 한국 힙합 1세대 가리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990년대 들어 주류 가요계에서 랩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등이 랩과 힙합 리듬을 활용한 댄스 음악을 선보인 데 이어, 에이치오티, 젝스키스 같은 아이돌 그룹들도 랩을 했다. 심지어 발라드 노래에도 중간에 랩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를 두고 한국 힙합이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렸다고 보는 이는 거의 없다. 진짜 한국 힙합의 씨앗은 물밑에서 배양되고 있었다.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인 1997년 피시통신 하이텔에 흑인음악 동호회 ‘블렉스’가 생겼다. 힙합을 좋아하던 당시 26살 청년 이재현은 회원들과 엠피3 파일로 블렉스 1집을 만들었다. 그해 말 서울 신촌의 힙합 클럽 마스터플랜에서 블렉스 공연을 할 때였다. 객석에 있던 20살 청년 정현일이 갑자기 무대에 올라 즉흥 랩을 쏟아냈다. ‘뭔가 불타오르는 게 있는 놈이군.’ 이렇게 생각한 이재현은 나중에 그를 찾아가 같이 활동하자고 제안했고, 정현일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전설 속에 존재하는, 갈기만 검은 백마를 뜻하는 ‘가리온’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재현은 ‘엠시(MC) 메타’가 됐고, 정현일은 ‘나찰’이 됐다.

하이텔 흑인음악 동호회로 시작
영어 하나 없는 100% 우리말 랩
철학적 사색 담은 노랫말 선보여
“국내 힙합시장 크게 성장했지만
가짜가 판치는 부조리 더 심해져”
내년 ‘다시 힙합’ 내건 3집 준비중

1998년 마스터플랜에서 데뷔 무대에 올랐다. “내게서 너는 숨길 수가 없어/ 니 몸속에 숨어있는/ 진실을 봤어 분노를 봤어.” ‘그래서 함께하는 이유’라는 곡을 통해 두 래퍼가 왜 가리온으로 뭉쳤는지 설파했다. 1999년 발표한 블렉스 2집에는 가리온의 이름으로 ‘거짓’을 실었다. “왜 그런 거짓된 삶을 살까?/ 이젠 다시 돌이킬 순 없는 걸까?/ 거짓이 가득한 세상에서, 내 속에서/ 진실이란 기대할 수 없는 걸까?” 가리온이 앨범으로 발표한 데뷔곡이 ‘거짓’이었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이는 “거짓 힙합이 판치는 당시 가요계에 대한 비판”이었다.

가리온 앨범
가리온 앨범

“당시 유행하던 ‘랩 댄스 음악’은 자기 얘기가 아니었어요. 그저 힙합의 껍데기만을 흉내낸 것에 불과했죠. 힙합은 랩을 통해 자기 얘기를 하는 거예요. 내 삶이 아무리 초라하고 별볼일 없어도 그걸 진실되게 얘기하는 게 진짜 힙합인 거죠. ‘거짓’을 통해 우리는 거짓된 힙합이 아니라 진실된 힙합을 하겠노라고 선언했던 겁니다.”(엠시 메타)

이후 가리온은 부침을 겪으며 외길을 걸어왔다. 오랜 준비를 거쳐 2004년 발표한 1집 <가리온>은 영어 추임새 하나 없이 100% 우리말로 이뤄낸 정교하고 아름다운 랩, 철학적 사색을 담은 노랫말, 깊고 묵직한 비트가 조화를 이룬 한국 힙합의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언더그라운드라는 한계와 음악의 무게감 탓인지 대중적으로 빛을 보진 못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엠시 메타는 음악을 중단하고 종합병원 주차관리 요원으로 일했다. 나찰은 대학에 복학해 체육 교사가 되는 과정을 밟았다.

그래도 힙합을 놓을 수 없다고 여긴 둘은 2005년 말 다시 뭉쳐 디지털 싱글 ‘무투’와 ‘그날 이후’를 잇따라 발표하며 재시동을 걸었다. 곧바로 2집 준비에 들어가 이듬해까지 80% 이상을 만들었지만, 이후 여러 변수를 맞닥뜨려야 했다. 음악 활동에 도움이 될까 발을 들인 뮤지컬 <래퍼스 파라다이스>는 시간만 잡아먹었고, 나찰은 허리 디스크에 걸렸다. 엠시 메타는 말 못할 개인사정으로 고향 대구로 내려갔다.

오랜 고민 끝에 상경한 엠시 메타는 나찰과 다시 작업에 매달렸고, 2010년 무려 6년 만의 새 앨범인 2집 <가리온2>를 내놓았다. 힙합 팬들은 돌아온 한국 힙합 1세대 거장에게 존경과 환호를 보냈다. 이 앨범은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음반을 비롯한 3관왕의 영예를 안았다. 지속적으로 성장해온 국내 힙합계는 가리온의 복귀로 더욱 활기를 띠었다. 가리온은 언더그라운드 힙합계뿐 아니라 타이거제이케이, 다이나믹 듀오 등 주류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힙합 음악인들로부터도 존중받는 존재였다. 가리온은 지난해 시작한 <엠넷>의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 <쇼 미 더 머니>에도 심사위원으로 출연해 대중과 친숙해졌다.

 가리온 공연 모습.  피브로사운드 제공
가리온 공연 모습. 피브로사운드 제공

그렇게 한국 힙합과 함께 15년 외길을 걸어온 가리온은 최근 데뷔 15주년 기념 앨범을 오프라인 시디 없이 온라인으로만 발표했다. 가리온의 15년, 한국 힙합의 15년이 오롯이 농축돼 있다. 첫 곡은 ‘그래서 함께하는 이유 2013’이다. 15년 전 가리온의 이름으로 처음 무대에 올라 불렀던 ‘그래서 함께하는 이유’의 노랫말을 일부 활용한 새로운 곡이다. “오직 하나뿐, 내 마음이란 건/ 오직 하나뿐, 내 믿음이란 건/ 오직 하나뿐, 서로를 믿고 의지해/ 그래서 함께하는 이유.” 15년이 지나도 여전히 함께하는 이유다.

데뷔곡 ‘거짓’의 일부 가사를 넣은 두번째 곡 ‘거짓 2013’은 이번 앨범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다. “15년 전보다 국내 힙합시장의 외양은 엄청나게 성장했지만, 가짜가 판치는 부조리는 더욱 심해졌다”는 것이다. “가짜 진짜는 가짜/ 진짜 가짜는 가짜/ 진짜 진짜는 진짜야!”라는 짧지만 강렬한 후렴구에 모든 걸 담았다.

“요즘 힙합이 돈이 된다고 하니 장사꾼들이 너무 많아졌어요. 사랑과 이별 얘기를 말랑하고 감성적인 랩으로 담아낸 이른바 ‘발라드 랩’이 뜨니까 너도나도 그것만 해요. 언더그라운드에서 자기만의 랩을 하던 친구들도 주류 무대로만 건너가면 그런 걸 하니 그게 꾸며낸 거짓이지, 진실된 얘기겠어요?”(엠시 메타)

“래퍼도 얼마든지 사랑 노래를 할 수 있어요. 래퍼도 연애하고 이별하니까요. 그렇다면 각자 보여줄 수 있는 자신만의 사랑 얘기를 담으면 되는데, 그저 뻔한 유행가 가사 같은 랩만 하니 아쉬운 거죠. 차라리 데프콘처럼 솔직하게 ‘나 돈 벌려고 이런 랩 한다’고 밝히는 게 진짜 힙합 아닐까요? 우린 그런 데프콘을 존중해요.”(나찰)

최근 몇몇 래퍼들이 랩으로 서로를 공격하는 디스전을 벌인 것에 대해서도 이들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서로 창작욕을 자극해 결과적으로 힙합계에 도움이 되는 긍정적 효과보다는 폭로전과 개인 감정의 배설로만 치우쳤다”는 것이다.

이들은 마지막 곡 ‘패러독스’를 통해 진심을 얘기한다. 일부러 허세를 부리는 ‘스웨그’로 곡 대부분을 장식하고는, 맨 마지막에 진짜로 하고 싶은 얘기를 꺼낸다. “내 팬이 많지 않아도 돼, 랩을 들어봐/ 이제 의미없는 스웨그 따위 안 뱉으니까/ 내 음악을 듣고 마음이 움직였단 말/ 난 듣고 싶어, 진짜 필요해 누군가.” 가리온이 스스로에게, 그리고 한국 힙합 전체를 향해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다.

가리온은 14일 저녁 7시 서울 홍대앞 상상마당에서 데뷔 15주년 기념 공연 ‘뿌리 깊은 나무’를 열어 이런 메시지를 직접 읊는다. 내년에는 ‘다시 힙합’이라는 주제를 담은 3집을 낼 계획이다. (02)338-1238.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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