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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88만원 세대’의 미술관

등록 2014-04-24 19:38수정 2014-04-25 17:32

낡은 건물을 전시 공간으로 개조한 커먼센터에서 ‘오늘의 살롱전’이 열리고 있다. 곰팡이 핀 벽지와 시멘트 벽면 등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건물과 작품들이 쓸쓸하게 조응하는 이곳에서 우리는 그림과 전시공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요구받는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낡은 건물을 전시 공간으로 개조한 커먼센터에서 ‘오늘의 살롱전’이 열리고 있다. 곰팡이 핀 벽지와 시멘트 벽면 등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건물과 작품들이 쓸쓸하게 조응하는 이곳에서 우리는 그림과 전시공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요구받는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커먼센터 ‘오늘의 살롱전’
제법 널찍하게 펼쳐진 ㄴ자로 꺾인 어슴푸레한 공간. 시멘트 블록 6장을 포갠 곳에 전시회 취지를 간단히 알리는 A4용지 몇장이 덩그맣게 놓여있다. 녹슨 보일러 배관이 지나는 바닥은 고르지 못하다. 골조가 드러난 금 간 벽, 듬성듬성 쌓아올린 벽돌엔 세월의 흔적이 또렷하다. 뒤엉켜 흐르는 전선, 콘센트 구멍까지 어우러져 기괴한 표정을 짓는 벽면엔 크고 작은 캔버스가 빼곡하다. 거무튀튀한 알루미늄 창문 밑, 움푹 패인 틈새 공간에도 어김없이 그림이 걸려있다. 이곳은 한 때 중국집이었다.

뒷 마당. 누추한 계단을 통해 2층에 오르면 70~80년대 여인숙 같은 좁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207, 206…. 3~4층까지 17개의 방들이 저마다 독특한 형태와 냄새를 품은 채 촘촘히 박혀있다. 침실과 부엌을 가른 경계를 헐고 대강 바른 시멘트 미장 흔적, 주방을 장식했던 때 묻은 타일과 수채구멍도 숨기지 않았다. 허름한 형광등 빛과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햇볕 몇 조각이 어우러진 방마다 다소 거칠어 보이는 그림들이 터 잡고 있다.

영등포역 사창가 주변 낡은방
젊은 화가 위한 공간으로 재탄생
싱크대 뜯고, 곰팡이벽지 제거뒤
‘낡은 맨얼굴’ 위에 그림 내걸어

삶의 고단함 품은 17개의 방엔
작가 69명의 작품 148점 전시
“기성 미술계에 대한 저항 공간”

‘커먼센터’(서울 영등포구 경인로 823-2). 서울 영등포 역 주변에서 고단한 삶을 살았을 도시민들의 주거공간, 한 때 유명세를 떨쳤던 이 지역 사창가 포주들의 영업장으로도 쓰였을 낡은 방들이 전시공간으로 변신했다. 이름도 거창한 ‘오늘의 살롱전’이다. 19세기 프랑스 미술계의 주류 전시회였던 살롱전에서 이름을 따왔다. 하지만 전시 공간과 전시회를 준비한 기획자의 의도, 출품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살롱전 참여를 거절당한 화가들이 벌였던 ‘낙선전’의 개념에 좀 더 가깝다.

‘오늘의 살롱전’
‘오늘의 살롱전’

함영준, 김영나, 김형재, 이은우. 78년생 함영준을 중심으로 4명의 또래 디자이너와 작가들이 이른바 ‘88만원 세대의 작가’를 위한 전시공간을 자임하며 이곳 1층에서 ‘개관준비전’을 연 게 지난해 11월29일. 그리고 긴 겨울 동안 저마다 삶의 흔적과 체취를 품은 2~4개층 17개의 방은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전시실로 ‘변태’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유명 사립 갤러리, 일부 대안 공간으로 3분된 기존 미술 전시실과 어떻게 하면 다르게 접근할까 고민했다. 솔직히 경제적 이유도 크게 작용했다.” 기획자 함영준씨는 이곳을 기성 미술계에 대한 저항의 공간, 궁핍한 젊은 화가들을 위한 기회의 공간으로 위치지웠다. 미술시장에서 일종의 ‘반란’을 도모한 셈이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미술관, 갤러리의 말쑥함, 친절함과도 거리가 멀다. 그 흔한 작품 설명서도 없다. 작가의 이름이라도 알고 싶다면 각 방 문짝이나 입구에 붙어있는 자그마한 종이 쪽지를 꼼꼼히 살피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301호. 곰팡이가 잔뜩 핀 실크벽지를 대강 뜯어낸 뒤 너저분한 시멘트 벽면에 걸린 캔버스에서 푸른 원색을 배경으로 폭포가 흘러내리고, 호수에선 배가 유영한다. <상승과 하강이 뒤범벅 된 세상>(조상은 작)이다. 206호. 이곳에 거주하던 누군가가 피곤에 겨워 매일 밤 옷을 벗어 걸었을 콘크리트 못 2개가 박혀있다. 그 아래 이름도 요상한 <경상도 빨갱이>(김현태 작)가 있다. 고급 소파가 놓인 화사한 창가, 물감으로 뭉개 표정을 알 수 없는 한복 차림의 여인과 말쑥한 양복을 걸친 두 중년 남성이 젊은이에게 뭔가 열성적으로 얘기한다. 60년대 영화의 한 장면을 차용한 이 작품은 시골에서 올라온 작가가 그림을 그리면서 부모와 겪은 갈등을 표현한 것이란다.

‘오늘의 살롱전’
‘오늘의 살롱전’
대개 이런 식이다. 싱크대를 뜯어낸 벽면에 남겨진 타일을 프레임 삼아 내걸린 그림, 안방과 욕실을 가르던 벽에 난 창문 틀을 통해 보여지는 그림…. 곰팡 내음과 낡은 시멘트벽, 물 샌 천장이 작품들과 쓸쓸하게 조응한다.

온전히 보존되기를 원하는 작가라면 작품을 쉽게 내줬을 것 같지 않은 이런 공간에 모두 148점이 내걸렸다. 대부분 1984~5년생, 스스로를 ‘중견이라 하기에는 조금 경력이 짧은 작가’로 분류한 69명의 출품작이다. 서로의 작품을 통해 동시대 화가들의 예술적 흐름을 인식하고 교류할 수 있기를 갈망했지만, 전시 공간조차 찾지 못했던 30대 초반의 작가들이 알음알음 모였다. 아직 자신들의 명확한 경향성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다만 “오늘, 한국의 회화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많은 벽을 그림으로 가득 채우면 그 안에서 모인 그림들이 자연스레 동시대 미술문화의 단면을 상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밝힐 뿐이다.

함씨는 “우리도 그림을 판매한다. 다만 호당 가격을 정하는 방식이 아닌 건전한 그림장사를 할 것이다”고 했다. 이곳에 가면, 우리는 미술 작품과 전시 공간에 대한 인식의 교정을 요구받을 것이다. 5월18일까지. (070)7715-8232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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