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음악·공연·전시

“십시일반 ‘굿전’으로 삼십년 버틴 시민놀이공동체 뿌듯”

등록 2014-10-16 19:11수정 2015-01-15 14:25

풍물패 터울림의 상근 대표 홍성민. 김경애 기자
풍물패 터울림의 상근 대표 홍성민. 김경애 기자
[짬] 풍물패 터울림 상근대표 홍성민씨
“우리끼리는 ‘굿전 정신’이라고들 하는데요, 예인들 특유의 오기랄까, 힘들면 힘든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십시일반 모아서 나누며 함께 버텨온 거죠.”

올해로 창립 30돌을 맞은 풍물패 터울림의 상근 대표 홍성민씨는 “지금껏 기부금이나 후원금도 받지 않은 채 회원들 회비와 외부 초청 공연 수입으로 활동해왔다. 무엇보다 주민들과 함께 지역 행사에 참여해 생활문화의 하나로 인정받은 덕분에 유지해 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고정 활동 회원 100명에 누적 회원(234기) 4000여명을 배출한 터울림의 성공 사례는 오늘날 풍물놀이를 비롯한 민중문화운동이 처한 현실과 더불어 해법을 고스란히 말해준다. “풍물은 연습 때나 공연 때나 넓고 열린 공간이 필요하고 소리도 크다 보니 아파트나 주거시설이 밀집된 도시 지역에서는 우선 소음 민원이 심하죠. 굿판이 열리면 막걸리판도 곁들이게 되는데 음식 냄새나 연기로 인한 민폐도 생기고요. 그러다 보니 연습도 지하공간에서 주로 해야 하고, 마땅한 공연장도 찾기 어렵고…그런 한계를 넘어설 만큼 생활문화공동체로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단체들은 하나둘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 것 같아요.”

오는 19일 오후 2시 서울 은평초교 운동장에서 30돌 기념 가을굿 잔치 ‘어영차-청청, 해방세상 들래’를 펼치는 터울림의 생존 비법을 들어봤다.

터울림은 1984년 대학 풍물패와 민요패 출신들이 모여 서울 은평구 홍제동에서 풍물강습소로 시작했다. 하지만 1년 남짓 만에 단원들이 문화운동, 노동현장, 농촌활동 등등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면서 단명의 위기를 맞았다. 다행히 그사이 강습을 받은 회원들이 뭉쳐 86년 불광동에 연습실을 마련하면서 회생했다. 때마침 87년 노동자 대투쟁과 6월항쟁을 겪으며 민중문화운동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도 높아져 회원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92년에는 홍대 앞 동교동 삼거리에 공간을 하나 더 마련해 대학생과 노조원들을 대상으로 대중 강습을 본격적으로 확대해 94년 무렵 활동의 절정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97~98년 외환위기가 닥쳐 노동 현장 조직이 와해되고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게 되자 강습 회원도 급감했다. 일부 단체는 지자체의 문화센터와 학교의 풍물 교육으로 돌파구를 찾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터울림 자체가 시대의 산물이어서 1980년대 이래 사회변혁운동의 변화 속에 부침과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던 거죠.”

86년 대학에 입학해 탈춤반에 들어가면서 민중문화의 매력에 푹 빠진 홍 대표는 졸업을 앞둔 89년 선배 소개로 당시 불광동 지하 연습실을 방문하면서 터울림과 인연을 맺었다. “불광동 시장 골목의 순댓집에서 막걸리 면접을 거쳐” 활동가로 합격한 이래 그는 지금껏 25년째 터울림의 최장수 터줏대감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4년 대학 탈춤·노래패들 터잡아
은평구 불광시장 지신밟기로 시작
상근 활동 단원 100명·누적 회원 4천명

지역사회 손잡고 해체 위기 넘어
서울 도심 드문 시민풍물단체 성장
19일 창립 30돌 주민들과 가을굿판

“초기 4년간은 서노문협에 터울림 대표로 파견돼 ‘닭장’으로 상징되는 구로공단을 비롯해서 곳곳의 노동 현장을 돌아다니며 풍물패를 조직하고 문화 교육 활동을 했어요. 90년 전후 노조 결성 전성기 때는 울산 현대중공업 등 전국을 돌며 문화운동을 하게 됐고요. 그러다 94년 무렵 터울림 상근자로 돌아왔죠.”

돌아오자마자 터울림 창립 10돌 기념 잔치를 준비한 그는 그때 기획했던 ‘풍물굿판’이 큰 호응을 얻으면서 해마다 가을굿으로 이어오고 있다고 소개했다. 전래의 풍물 연주 양식에 시사 문제를 주제로 한 이야기판을 곁들여 사회 현실에 대한 풍자와 발언도 하고, 대동놀이·강강술래·난장 등으로 모두가 어울릴 수 있는 굿판은 말 그대로 한바탕 신명난 잔치판이라 할 수 있다.

터울림은 지역사회와 연대한 덕분에 외환위기의 파고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창립 때부터 해마다 정월 대보름 불광시장 일대에서 했던 지신밟기는 물론이고 크고 작은 주민 행사에 기꺼이 찬조 출연을 해온 것이다. 2010년부터는 가을이면 주민주도형 은평누리축제를 기획해 홍 대표가 축제 집행위원장을 맡는 등 주도하고 있다.

“사실 90년대 결성됐던 서울지역풍물단체협의회가 최근 활동을 잠정 중단했어요. 자생적인 민간문화운동단체들의 기반이 그만큼 무너졌다는 방증이죠. 그나마 터울림이 버틸 수 있는 힘은 남달리 강한 회원들의 결속력이 아닌가 싶네요.”

대부분 고수를 비롯한 전통연희 명인인 사부와 제자, 또는 강사와 학생의 관계로 맺어지는 단체와 달리, 터울림은 일정한 새내기 교육 과정을 거친 뒤 소모임을 선택해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연습과 활동을 함께 한다. 문화 소외 지역이나 도움이 필요한 사회 현장을 찾아다니며 공연 기부로 공동체 연대의식도 키우고 있다. 10년 이상 장기 회원에게는 ‘공로 반지’를 선물하는데 현재 20여명이 받았고, 회원 커플도 홍 대표 부부를 포함해 25쌍에 이른다.

이번 30돌 기념 굿판에는 그동안 터울림과 인연을 맺어온 모든 단체들이 가세해 큰잔치를 펼친다. 창단 회원들은 ‘오비팀’을 꾸려 맹연습 중이고, 전북 고창농악보존회 등 전통놀이 지도자들, 회원 2세들도 협연을 한다.

“이제는 서른 살 청년으로 자랐으니 성숙한 생활문화공동체로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고자 조직과 운영방식도 정비할 참입니다.”

홍 대표는 기념사업위를 꾸려 <터울림 30년 백서>를 발간하고 사단법인으로 전환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고 소개했다. 회원제 전통은 유지하되 ‘청년 정신’을 살려나갈 수 있도록 풍물만이 아니라 문화 전반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갈 계획이다. 최근 불광동 연습실을 풍물살림터로 새단장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전공인 임상병리학과 전혀 무관한 풍물과 문화운동에 투신하게 된 이유를 다시금 물었다.

“문화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어요. 지금도 풍물의 신명으로 담벼락을 허물고 마음을 열게 해서 더불어 잘사는 마을공동체를 만들고 싶고요.”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