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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메모글의 사운드 변신…음악인가 영화인가

등록 2015-01-07 19:17수정 2015-01-07 21:10

백현진(오른쪽)과 장영규로 이뤄진 아방가르드 팝 듀오 ‘어어부 프로젝트’가 14년 만의 정규 앨범인 4집 <탐정명 나그네의 기록>을 발표했다. 일기와 일지, 메모와 낙서가 뒤범벅된 텍스트를 음악화한 실험작이다. 프럼찰리레이블 제공
백현진(오른쪽)과 장영규로 이뤄진 아방가르드 팝 듀오 ‘어어부 프로젝트’가 14년 만의 정규 앨범인 4집 <탐정명 나그네의 기록>을 발표했다. 일기와 일지, 메모와 낙서가 뒤범벅된 텍스트를 음악화한 실험작이다. 프럼찰리레이블 제공
‘어어부 프로젝트’ 14년만에 4집 ‘탐정명 나그네의 기록’
‘어어부 프로젝트’의 백현진·장영규로부터 새 앨범 얘기를 처음 들은 건 4년여 전인 2010년 10월이었다. 국내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독특한 색깔의 음악을 들려주는 아방가르드 팝 듀오는 3집 <21세기 뉴 헤어>(2000) 이후 10년째 침묵해오던 터였다. “이번엔 무조건 앨범을 내자”고 다짐한 둘은 그해 3월 중국 옌볜의 원룸 오피스텔에 일주일 동안 틀어박혀 새 앨범 구상을 마쳤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만든 노래들을 곧 있을 공연에서 먼저 선보인 뒤 그해 말 앨범으로 발표할 거라 했다.

그로부터 4년이 흐른 지난해 말에야 4집 <탐정명 나그네의 기록>이 세상에 나왔다. 그동안 그들은 몇 차례의 공연을 거치며 변주를 거듭했다. 백현진은 네이버뮤직에 공개된 서면 인터뷰에서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에 대해 “말도 못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래서 말을 못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앨범 구상의 토대는 이렇다. “어느 날 종이뭉치를 주웠다. 뭉치를 풀어보니깐 첫 장에 나그네라 쓰여 있다. 뭉치는 삼백오십여덟장으로 구성돼 있었다. 어느 해 이가 빠진 일년치 기록이다. 읽어보니까 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고 또 추측해볼 수 있었다. 우선 그의 직업은 탐정이다. 명탐정은 아닌 듯하다. 그는 사십대로 추정되는 남한의 성인 남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 월 평균 소득은 꾸준히 삼사백 정도였는데 현재는 백오십 선인 것 같다. 소득이 그 정도니까 때때로 대리기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또한, 그는 여러 가지 복잡다단한 이유로 깊은 근심에 빠져 있는 듯하다.”

이는 그대로 앨범 두번째 곡 ‘탐정명 나그네의 기록에 부쳐’로 담겼다. 배우 문성근의 내레이션으로만 이뤄져 있다. 후반부에서 목소리가 살짝 이지러지면서 약간의 효과음이 더해진다. 내레이터는 말한다. “그의 종이 뭉치에서, 한달을 최소단위로 삼아서 각 단위에서 한두장씩 무작위로 발취한 열네장 기록을 오늘 여기에서, 순서 없이 소개하기로 한다.”

이어 ‘0107 빙판과 절벽’, ‘0312 도파민’ 같은 제목의 곡들이 흐른다. 앞부분의 숫자는 기록이 적힌 날짜인데, 곡 순서가 날짜 순서와 같은 건 아니다. 내용이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모든 기록은 순간의 생각을 담은 것이고, 그 기록들은 연관성이 거의 없다. 요컨대 이 앨범은 전체적으로 일관된 구성을 지니면서도 개별 곡들이 따로 노는 특이한 콘셉트 앨범이다. 청자는 전체 이야기를 파악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순간의 생각과 느낌만 받아들이면 된다.

2010년 중국 연변에서 만든 곡들
4년간 “말도 못할 과정” 거쳐 발매

전자음·마림바 조화 독특한 작법에
순서없이 탐정의 일년간 메모 노래
전체 이야기보단 순간의 느낌 표현

개별 곡이라 해서 반드시 일관된 흐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와 그녀 만났다. 그들 식사한다. 그와 그녀는 다정하다. 그들 여관에 들어간다. 그와 그녀 나온다. 그들 헤어진다. 남의 사생활 엿보는 것도 못해 먹겠다. 신물 난다. 애엄마가 한번 보잖다. 애 문제로 상의하잖다. 내 딸아인 예쁘게 큰다. 자주 못봐 가슴 아프다.”(‘0417 황색생활’) 불륜으로 의심되는 남녀를 미행하다가 갑자기 떨어져 사는 딸아이를 그리워하는 식이다. 백현진은 4년 전 인터뷰에서 “노랫말을 쓰는 데 <난중일기>가 도움이 많이 됐다. ‘오늘은 대포 쏘는 훈련을 했다’는 공적 기록을 담은 일지와 ‘아들놈 몸이 안좋아 걱정이다’라는 사적 감상을 담은 일기가 혼재된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바람을 마구 가르며 예쁜 아가씰 귀가시키고 있다. 나는 바람을 마구 가르며 예쁜 여자를 떠나보내고 있다”(‘1111 대리알바’)처럼 현실과 판타지를 가로지르는 시 같은 표현도 있고, “병신 같은 정부도 거지 같은 기업도 철저하게 쌩까고 철저하게 사적인”(‘0826 사적인’)처럼 날이 바짝 선 대목도 있다.

타고난 재담꾼이 된 백현진의 이야기를 때론 홍상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때론 영화 <인터스텔라>의 왜곡된 블랙홀 안 시공간처럼 만드는 건 장영규가 주조해낸 음악이다. 전자음과 팀파니, 마림바 같은 클래식 타악을 조화시키는 등 독특한 사운드 작법으로 기존 관습을 깨부수었다.

어어부 프로젝트의 새 앨범은 귀로만 듣는 음악이 아니다. 여백 많은 이야기를 청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그야말로 무한대로 뻗어가는 텍스트다. 음악극의 형태로 무대 위에서 구현됐을 때 즐거움이 더 커질 것 같은, 그런 음악이다. 공연이 기다려진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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