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3년 서울 인사동에서 열린 전시회 ‘ECM: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여러모로 특기할 만 했다. 독일의 세계적인 재즈 레이블이라고는 해도 하나의 음반사를 주제로 전시회를 연다는 것도 이례적인데, 전시 기간을 3주 더 연장했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몰렸다는 점도 놀라웠다. 관객들은 독립된 예술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시엠 앨범 표지를 눈으로 감상하고 귀로는 음악을 들었다.
이시엠 음반을 국내에 들여온 씨앤엘뮤직의 류진현 부장은 이 광경을 보고 ‘이시엠을 본격적으로 소개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지난해 내내 매달린 책 <이시엠 트래블스: 새로운 음악을 만나다>(홍시 펴냄)가 최근 출간됐다. 류 부장이 1500여장의 이시엠 음반 중 33장을 추려 소개한 책은 초심자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음반 해설서이자 이시엠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기다.
어릴 때부터 음악 듣는 걸 좋아하던 글쓴이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재즈 그룹 오리건의 음반 <오리건>을 접하고 이시엠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무슨 음악인지도 모른 채 그저 표지가 멋져서 산 엘피 음반은 그를 이시엠의 또 다른 음반으로 이끌었다. 피아니스트 키스 재럿, 기타리스트 팻 메시니 등의 음반을 들으며 ‘이시엠에는 뭔지 모를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고 느꼈다.
고교 시절 ‘오리건’ 음악에 푹
잘 다니던 회사 그만두고 음반사로
2003년부터 매년 30장 이상 소개
2년전 ‘ECM 전시회’ 성공뒤 집필
“키스 재럿 즉흥연주 끌렸다면 입문”
영문학을 전공하고 무역상사에서 일하던 그는 ‘좋아하는 일을 해보자’고 결심하고 입사 4년여 만에 회사를 그만뒀다. 2001년 씨앤엘뮤직에 입사했다. 2년 전부터 이시엠 음반을 국내에 유통해온 음반사였다. 처음에는 월드뮤직 음반을 담당하다 2003년부터 이시엠 음반을 담당하게 됐다. 이후 지금까지 해마다 30장 이상씩 꾸준히 이시엠 음반을 소개해왔다.
“재즈는 좋아해도 이시엠은 잘 모르는 분들도 많아요. 어려운 유럽 음악이 많은 레이블로만 알죠. 그런 분들이 이시엠의 음악을 듣도록 하는 길잡이가 되고 싶었어요.”
류진현 부장이 지난해 내내 매달린 책 <이시엠 트래블스: 새로운 음악을 만나다>(홍시 펴냄)가 최근 출간됐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칙 코리아, 키스 재럿, 얀 가바렉, 찰리 헤이든, 팻 메시니 등 거장의 명반을 소개한 1부, 재즈의 카테고리로 묶을 수 없는 월드뮤직이나 장르의 벽을 허문 명반을 소개하는 2부, 이시엠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 음악가들의 음반을 소개한 3부로 구성돼 있다.
“이시엠 색깔은 전적으로 만프레드 아이허가 만든 것입니다. 20대 후반이던 1969년 레이블을 세워 46년 동안 이끌어온 프로듀서죠. 그는 재즈 녹음에 클래식 녹음 방식을 도입했어요. 재즈 녹음 때는 보통 악기마다 마이크를 따로 설치하는데, 클래식 녹음을 하듯이 전체 공간에 마이크 하나만 두어 공간감을 강조한 거죠. 그에겐 재즈냐 클래식이냐 월드뮤직이냐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음악 속에 숨겨진 진정한 모습을 음반에 담아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죠.”
음악과 사운드에 대한 남다른 철학에 반해 연주자들이 하나 둘 그를 찾아왔다. 아이허와 연주자들은 계약 관계가 아니라 믿음을 바탕으로 작업한다. 누구와도 계약서를 쓴 적이 없단다. 아이허는 함께 연주해본 적 없는 이들을 조합해 녹음하는 걸 제안하기도 한다. 재즈, 클래식, 월드뮤직 등 장르가 다른 연주자들을 묶는 것도 좋아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명반이 한둘이 아니다. 아이허는 ‘크로스오버’라는 말을 싫어한다. “단순히 장르를 섞는 차원이 아니라, 이 연주자와 저 연주자의 고유한 음악이 만나 화학작용을 일으켜 새로운 음악이 탄생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지금 72살인 아이허가 100살까지 일해준다면, 또 그의 뒤를 잇는 후계자가 빨리 나타난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그게 잘 안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음악애호가로서 늘 합니다.”
초심자를 위한 관문 같은 음반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에 류 부장은 키스 재럿의 <쾰른 콘서트>(1975) 음반을 들었다. 독일 쾰른 콘서트 실황을 녹음한 앨범은 600만장 넘게 팔리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피아노 앨범이 됐다. 악보 하나 없이 무대에 올라 순수한 즉흥연주로만 이뤄낸 작품이다. “순간의 상상만으로 이런 아름다운 선율을 창조해냈다는 게 놀라워요. 이 음반을 듣고 좋은 느낌을 받는다면, 다른 그 어떤 이시엠 음반에도 흥미를 갖게 될 겁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