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웨스트엔드의 화제작이라는 포장도, 아이돌 군단으로 무장한 화려한 캐스팅도 부족한 작품성 앞에서는 결코 프리미엄이 될 수 없었다. 최근 비슷한 시기 개막한 뮤지컬 <체스>와 <베어 더 뮤지컬>은 현실과 맞닿지 않는 내용, 구태의연한 설정, 기시감 강한 소재 등 여러 약점을 드러냈다. 한국 초연작 중 상반기 최대 기대작으로 꼽혀온 두 작품이지만 여름 성수기를 맞은 뮤지컬 시장을 달구기엔 역부족으로 보인다.
브로드웨이 ‘체스’
러시아-미국 체스 챔피언 맞대결
80년대 냉전은 이젠 ‘옛날이야기’
20대 아이돌-40대 배우간 엇박자 웨스트엔드 ‘베어 더 뮤지컬’
10대 동성애·마약 등 소재 파격적
느슨한 구성·흔한 설정 약점 노출
록넘버·무대장치·연기력 등 매력
■ <체스>, 지금 이 시기에 왜 냉전시대 이야기?
지난 1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막을 올린 <체스>는 냉전 시기, 미국과 러시아의 대결을 ‘체스’에 빗대 표현한 작품이다.
방콕 세계 체스 챔피언십. 러시아 체스 챔피언 아나톨리와 미국 챔피언 프레디 트럼프는 우승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국가의 자존심 대결로 비화하고 언론의 부추김에 밀려 둘은 감정싸움에 휘말린다. 아나톨리는 프레디의 조수이자 연인인 플로렌스와 사랑에 빠지고, 사랑과 자유를 위해 미국으로의 망명을 선택한다. 8주 뒤, 헝가리 부다페스트 체스 챔피언십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세 사람은 ‘시대’라는 체스판 위의 ‘말’이 된다.
<체스>는 1986년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됐다. 제작 당시인 80년대 냉전의 현실을 고스란히 담은 셈이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한국의 현실에선 ‘옛날이야기’로 느껴진다. 가장 큰 강점인 체스라는 독특한 소재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무대 바닥을 흑과 백으로 나뉜 체스보드로 만들고 앙상블들이 체스 말처럼 움직이며 안무를 하도록 설정한 것이 전부다. 박진감 넘치는 ‘수 대결’을 예상한 관객들은 체스라는 소재가 양념에 불과할 뿐임을 깨닫는 순간, 김이 샐 수밖에 없다.
캐스팅도 문제다. 아나톨리는 조권(투에이엠)·켄(빅스)·키(샤이니)·신우(비원에이포) 등 20대 아이돌이 연기하고 프레디는 신성우와 이건명 등 중후한 40대 배우가 연기를 하다 보니 둘의 대결은 팽팽한 접전이라기보단 마치 체급이 맞지 않는 권투나 레슬링을 보는 느낌을 준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에비타>의 팀 라이스가 가사를 쓰고, 세계적인 그룹 아바의 멤버 비에른 울바에우스, 베니 안데르손이 작곡을 맡아선지 그나마 몇몇 넘버는 매력적이다. 하지만 1막 마지막에 미국 망명을 결정한 아나톨리가 “영원하리라~ 조국의 붉은 심장, 결코 잊지 않으리”라며 러시아를 찬양하는 등 극의 전개와 넘버가 따로 놀면서 이런 강점마저 퇴색한다. 3000석 규모의 대극장으로 뮤지컬 공연과는 맞지 않는다는 평가를 들어온 세종문화회관의 미흡한 음향시설도 극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인이다. 딕션(발음)이 좋지 않은 일부 배우의 대사와 가사는 아예 들리지 않을 지경이다. 7월19일까지. (02)764-7857.
■ <베어 더 뮤지컬>, 더 이상 파격적이지 않은 설정
서울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17일 공연에 돌입한 <베어 더 뮤지컬>은 보수적인 가톨릭 기숙학교를 배경으로 10대의 동성애, 마약, 섹스, 임신, 자살 등의 문제를 다룬다.
내성적인 성격의 피터와 학교 킹카 제이슨은 사귀는 사이다. 몰래 하는 사랑에 지친 피터는 커밍아웃을 하자고 졸라대지만, 집안의 실망을 두려워하는 제이슨은 이를 거부한다. 고등학교 3학년인 둘은 연극반에서 졸업공연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습하게 된다. 줄리엣 역을 맡은 퀸카 아이비는 로미오 역의 제이슨을 노골적으로 유혹하고 아이비를 짝사랑하던 맷은 우연한 기회에 제이슨과 피터의 관계를 알게 된다. 계속해서 커밍아웃을 종용하는 피터에게 제이슨이 결별을 고하고, 홧김에 아이비와 은밀한 관계를 맺게 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베어…>는 소재의 ‘파격성’을 가장 큰 특징으로 내세웠다. 문제는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됐던 2000년에는 10대의 동성애나 마약 복용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이 ‘파격’이었을지 모르지만, 15년이 흐른 현재는 흔한 소재가 됐다는 점이다. 이미 <스프링 어웨이크닝>, <쓰릴 미> 등 동성애를 다룬 작품부터 <프리실라>, <킹키부츠>, <라카지> 등 트랜스젠더 성소수자 이야기를 전면에 드러낸 작품까지 쏟아져 나와 기시감을 극복하기도 힘들다. 외모 때문에 고민하는 나디아, 자격지심과 질투심에 괴로워하는 맷 등 주변 인물이 오히려 감정을 이입하게 한다.
소재가 익숙하다면 구성이라도 촘촘해야 한다. 하지만 <베어…>는 제이슨과 피터의 동성애에 가해지는 사회적·종교적 억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연극반 담당 수녀는 고민하는 피터에게 “넌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위로한다. 이런 상황에서 왜 주인공이 극단적인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고 가는지 설득력이 부족하다. 극중극 형태인 <로미오와 줄리엣>에 주인공들의 감정을 녹여내는 방식도 어쩐지 ‘야오이 만화’(남자 동성애 만화)의 흔한 설정을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청소년들의 터질 것 같은 예민한 감수성을 실은 시적이고 서정적인 대사, 주인공의 감정 기복에 따라 부드러움과 강렬함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록 넘버, 중극장의 특성을 잘 활용한 단출하고 효과적인 무대장치는 이 작품만의 장점이다. 중간중간 삽입된 감성적인 첼로 연주도 매력적이다. 성두섭·정원영을 제외하면 거의 신예에 가까운 배우들의 연기는 참신한 느낌을 준다. 다만 딱 맞아떨어져야 할 합창 부분에서 생기는 불협화음은 앞으로 보완해야 할 듯하다. 8월23일까지. 1588-5212.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사진 각 회사 제공
러시아-미국 체스 챔피언 맞대결
80년대 냉전은 이젠 ‘옛날이야기’
20대 아이돌-40대 배우간 엇박자 웨스트엔드 ‘베어 더 뮤지컬’
10대 동성애·마약 등 소재 파격적
느슨한 구성·흔한 설정 약점 노출
록넘버·무대장치·연기력 등 매력
한국 초연작이자 여름 성수기 최대 기대작으로 꼽혔던 뮤지컬 <체스>.
역시 한국 초연작이자 여름 성수기 최대 기대작으로 꼽혔던 뮤지컬 <베어 더 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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