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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난쏘공’ 연상시키는 수상한 축제의 현장

등록 2015-12-01 20:41

켄트리지가 2012년 만든 5채널 영상설치물 ‘시간에 대한 거부’. 벽과 숨쉬는 기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그림자 퍼포먼스를 통해 인간이 시간과 운명을 피해갈 수 있는가란 물음을 던지는 작품이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켄트리지가 2012년 만든 5채널 영상설치물 ‘시간에 대한 거부’. 벽과 숨쉬는 기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그림자 퍼포먼스를 통해 인간이 시간과 운명을 피해갈 수 있는가란 물음을 던지는 작품이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윌리엄 켄트리지 ‘주변의 고찰’ 전

남아공 출신 거장 한국 첫 개인전
목탄 드로잉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시각장르 융합시켜
역사의 비극·누추한 삶 담아내
이 전시는 고단한 세상을 담은 거대한 유랑극장이다. 관객들은 입구에서 축제판처럼 흥청거리는 소리 속에 먼저 휩싸인다. 빵빵거리는 브라스밴드 연주음이 시종 울리고, 톡톡거리는 현대음악의 리듬과 군중의 웅성거림이 들린다. 흥겨워질 듯한 기분에 벽면을 쳐다보면, 시커먼 목탄 드로잉과 움직이는 조각, 영상들이 사람과 동물, 나무, 글자, 기호, 주검, 기계 등의 이미지를 담고 흘러가는 정경이 펼쳐지고 있다.

1일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막한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거장 윌리엄 켄트리지(60)의 개인전 ‘주변의 고찰’은 조세희 작가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을 떠올리게 하는 은유와 상징의 풍경들이다. 흥청거리지만 왠지 수상한 느낌이 감도는 축제판 분위기가 그렇고, 목탄 드로잉과 드로잉 사진들로 만든 애니메이션, 소극장, 인간의 음향 같은 작품 요소들은 서정적인 은유와 중첩된 상징으로 뒤덮여 있다. 하지만, 작품들 속 이야기는 대개 역사의 비극과 누추한 삶에 관한 것들이다.

켄트리지는 리투아니아계 유대인 이민가정 출신이다. 남아공에서 백인 지배층이면서도 반유대 정서를 의식하며 살았다. 1990년대부터 인종차별정책의 국가폭력을 고발한 드로잉들로 각광받기 시작했고, 소수자, 이성과 계몽의 폭력성, 대학살 등의 역사적 상처 등을 다루며 작업 반경을 넓혀왔다. 남아공에서 미술을, 프랑스에서 연극을 공부했고, 무대미술가와 티브이 아트 디렉터로 일해 다양한 시각장르를 융합시킨 작업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 출품작들도 소재와 기법, 구도가 다채롭다. 남아공의 인종차별 역사와 원주민 학살부터 공허하게 끝난 세계 각지의 혁명 유토피아와 지금 일상에 대한 성찰까지 여러 다양한 역사적, 사회적 소재들을 미디어아트나 연극적 구도로 풀어낸다. 고루한 현실 속에서도 삶을 지속해야 하는 지금 사람들의 비애와 고뇌를 담은 휴머니즘이 켄트리지 작업의 핵심인데, 이런 측면에서 주목되는 작품이 ‘프로젝트를 위한 드로잉’ 연작의 일부인 94년작 설치작품 ‘망명 중인 펠릭스’다. 백인 부동산개발업자인 소호와 부인, 부인의 정부인 시인 펠릭스의 삶을 통해 남아공 사회상과 사람들의 내면과 고뇌를 상징적인 연극 구도로 보여주는 이 목탄 드로잉은 사회적 현실과 개인의 일상을 함께 포착해 성찰하는 작가의 특장을 잘 보여준다.

‘시간에 대한 거부’는 세계 굴지의 미술제 ‘카셀 도쿠멘타 13’에서 절찬을 받았던 작품이다. 나무상자와 공사자재, 잡동사니 등이 나동그라진 거친 전시공간 벽면으로 필립 밀러의 현대음악 리듬에 맞춰 퍼포먼서와 춤꾼들의 율동이 그림자가 되어 흘러가면서 인간을 구속해온 근대적 시간의 굴레를 풍자한다. ‘블랙박스’ 제목이 붙은 소극장은 20세기초 독일령이었던 남서아프리카의 나미비아에서 자행된 헤레로 원주민 대학살의 기억을 풀어내고 있다. 당시 학살명령서를 비롯한 역사적 자료들을 화폭 삼아 인간과 기계 등을 그린 목탄 드로잉과 애니메이션이 펼쳐지고 코뿔소를 사살하는 장면 등을 기계 설치물을 통해 재연하면서 이성의 명분 아래 자행된 서구 제국주의의 야만을 되짚었다.

켄트리지의 작품은 문화사가 호위징가가 말한 ‘놀이하는 인간(호모 루덴스)’의 전형이다. 곡절 많은 정치 역사적 메시지를 다루지만, 항상 유희정신이 바탕에 깔려있다. 그래서 인간적이고 친근하다. 인문학자 서경식씨는 전시서문에 ‘매우 절실한 친근감’을 불러 일으킨다고 써놓았다. 브라스 밴드 음향으로 시끄러운 설치 작품 주위를 얼쩡거리다보면, 인간 운명을 몽상하는 그의 검은 이미지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될 것이다. 내년 3월27일까지. (02)3701-9500.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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