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주 신작. 도판 국제갤러리 제공
국제갤러리 김홍주 신작전
이젠 화단 원로가 된 김홍주(70) 작가는 40여년을 고행하듯 한땀한땀 그림을 ‘새겨’왔다. 70년대 초창기엔 경대 거울에 극사실적인 여인상을 그려넣었고, 80년대엔 유형학적 지도 같은 촌락 풍경들과 사람 얼굴을 닮은 산야, 인분 덩어리 같은 알 수 없고 야릇한 글씨그림들을 내놓더니, 말년에는 희미한 윤곽만 남은 꽃과 사물들의 희미한 형상이 붓끝에서 삐어져 나왔다. 추상미술 대 사실주의의 진영논리를 떠나 많은 미술인들이 화가중의 화가로 그를 꼽는 건 회화의 수도사라고 할만큼 일관되게 그림 자체를 질문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연말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 마련된 그의 신작전에서 그리기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물어온 스타일리스트의 모습을 다시금 엿보게 된다.
무수한 갈필 선 엉키고 설켜
흐릿한 형상 속 단색화 느낌
모두 제목이 없는 13점 출품작들은 작은 붓으로 직조된 화폭의 골과골 사이를 꼼꼼하게 덧칠하면서도 일반인은 쉽게 알아볼 수 없는 형상으로 귀결된다. 화폭 위에 물이 별로 묻지 않은 갈필로 꺼끌꺼끌한 잔선을 무수히 반복하고, 그 과정에서 선들의 엉킴과 겹침으로 각지거나 동글동글한 윤곽선 아래 과일, 얼굴, 꽃봉오리, 입술, 얼굴 등의 희미한 이미지가 생겨난다. 18세기 거장 겸재 정선의 걸작 <금강전도>의 내금강 일부를 숨은 그림 찾기처럼 항아리 형상 안에 모두어 넣은 작품도 있지만, 원작과는 다른 흐릿한 갈필들의 뒤엉킴에 가깝다. 사실 작가에게 재현은 화두가 아니며, 그만의 시각과 생각으로 그림을 해체하는 것이 중요한 요체가 된다. 70년대 미술대학 권력자들이던 박서보, 하종현 작가 등이 그린 벽지풍의 모노크롬 회화가 강요된 유행처럼 다가왔을 즈음 전위 작가그룹 ‘공간과 시간(ST)’에서 활동하던 그는 전혀 다른 맥락의 착시를 일으키는 실물+극사실회화 작품으로 모더니스트의 정체성을 드러낸 바 있다.
오직 작가가 주체가 되어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전능한 감각주의는 지금까지의 김홍주 그림을 지탱해온 요소다. 최근 병고를 겪어 작업을 과거처럼 다작을 할 수 없게 된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40여년 올곧은 모더니즘 화풍을 더욱 단순화한 형상과 색감으로 보여준다. 다만, 내놓은 세필화들의 이미지 구성과 색감들은 요즘 한창 뜨고있는 단색조회화의 화면과 비슷하게 바뀌어 과거 모노크롬에 거리를 두었던 화력에 비춰 이례적으로 보인다. 일부 작품은 단일한 색조로 아예 화폭 전체를 뒤덮어 단색조그림의 변종 같기도 하다. 그가 전속된 화랑이 최근 단색조회화 바람을 주도한 메이저 상업화랑이란 점까지 감안하면, 형상보다 표면을 강조한 신작들은 지금 시장 트렌드에 부합한다는 느낌을 피하기 어렵다. 작가인 김용익 가천대교수는 “입술 모양 등의 불온한 형상성을 띤 작품들도 있지만, 상당수 출품작들이 모노크롬을 좇는 평면 색조작업들이라 기대에 다소 못미친다”고 평했다. 내년 1월24일까지. (02)735-8449.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흐릿한 형상 속 단색화 느낌
김홍주 신작. 도판 국제갤러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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