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판 가나아트 제공
가나아트센터 ‘리얼리즘의 복권’전
권순철·오치균 등 8명 구작·근작
80~90년대 참여미술 미학 재조명
권순철·오치균 등 8명 구작·근작
80~90년대 참여미술 미학 재조명
커다란 귀를 가슴에 달고, 목엔 눈동자가 붙었다. 이 요괴 같은 인간이 손, 귀가 잘린 모습으로 화폭 위를 마구 뛰어다닌다.
사람들의 눈과 귀를 틀어막았던 독재의 시절, 작가는 세간에 떠돌던 온갖 수상한 풍문들을 이렇게 기괴한 인간의 몰골로 화폭에 표현해냈다. 1980년대 초 참여미술 진영의 지성파로 통했던 민정기 작가의 그림 ‘소문시리즈2 ’다. 서구 모더니즘 미술의 지성 정신과 질식할 듯한 당시 도시화의 현실 사이에서 번민했던 그는 불온한 생각들이 요기처럼 꿈틀거리는 도회적 그림들을 쏟아내며 주목받았다.
‘소문시리즈2’는 28일부터 서울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 전관에서 시작되는 ‘한국현대미술의 눈과 정신Ⅱ-리얼리즘의 복권’ 전의 출품작이다. 이 작품이 진열된 5층의 민정기씨 전시실부터 권순철·오치균(4층), 임옥상·고영훈(3층), 황재형(2층), 신학철(1층), 지하층의 농민화가 이종구씨 전시실까지 80~90년대 리얼리즘 작가 8명의 구작과 근작들이 지층을 더듬듯 새로운 눈맛으로 차례차례 와닿는다.
전시는 80년대 화단을 지배한 추상 단색조 그림의 질곡을 벗고 당대의 정치 사회적 현실을 비판하는 참여미술 운동으로 태동한 ‘민중미술’ 구작들이 주축이다. 우리 근현대사의 사건들과 희생자들의 주검, 압제의 상징들이 뒤발된 신학철 작가의 한국 현대사 연작과, 2년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전 때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던 문익환 목사 방북을 담은 임옥상 작가의 대작 그림이 반갑게 눈에 들어온다. 농민화가 이종구씨의 쌀포대에 그린 농민들의 얼굴과 소그림 등도 아련한 감회를 일으킨다. 한편에는 극사실적으로 새날개 등 정물을 묘사한 고영훈 작가와 핍진한 묘사력으로 몸의 굴곡과 내면 이미지까지 포착한 오치균 작가의 인체 연작 등도 눈에 띈다.
이번 전시는 국내외 미술시장에 민중미술을 비롯한 리얼리즘 작품들을 ‘간보기’하려는 의도로 차려졌다. 전시를 꾸린 가나아트 화랑의 이호재 회장은 “최근 각광 받는 70~80년대 단색조 추상미술에 이어 한국 현대미술의 또다른 정체성을 형성한 80~90년대 리얼리즘 작품들을 해외시장과 컬렉터들 앞에 소개하는 게 가장 주된 목적”이라고 했다. 80년대 참여미술 진영의 평론가로 활약했던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에게 전시 자문을 맡긴 것도 시장에서 리얼리즘 계열 작품들의 가치를 재조명하겠다는 화랑 쪽의 의지로 읽힌다.
소개전 성격에 가깝다보니 작품 구성이나 배치 등에서 참신한 기획틀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민중미술 작가들과 고영훈, 오치균씨 등 또다른 계통의 기법적 리얼리즘 작가들을 섞은 것은 어색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한계와는 별개로 작품들을 돋보이도록 이끄는 힘은 바로 시간이다. 당대 날서고 거칠게 다가왔던 리얼리즘 작가들의 구작들이 수십년 세월을 겪은 뒤 새로운 미감과 정취로 다가오는 묘한 끌림이 있다. 이런 매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신학철, 황재형, 임옥상 작가의 근작들이다. 달밤 소달구지를 타고 귀가하는 농민들의 아련한 정경을 담은 2000년대 신씨의 근작들과 노동자 출신 어르신들의 뒤안길 같은 얼굴들을 포착한 황재형씨의 인물화, 그리고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 시위 현장과 물대포에 쓰러진 농민 등을 담은 임옥상씨의 대작들이 여전히 녹슬지 않은 그들의 작업 열정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는 2월28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가나아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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