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현진 작가의 출품작인 ‘문명의 골짜기’(2014)의 일부. 특유의 예민한 붓질 흔적과 세련된 색채감이 인상적이다. 사진 노형석 기자
1970년대 어르신 화가들의 벽지 같은 단색조 그림들로 뒤덮인 서울 북촌 화랑가에 기괴하면서도 세련된 신작그림들이 튀어나왔다. 70~80년대를 풍미한 미국, 유럽 화단의 미니멀리즘, 신표현주의 그림 같은 분위기를 띠면서도 좀체로 볼 수 없었던 신선한 색채감과 섬세하고 예민한 붓질의 마티에르(질감)가 도드라지는 작업들이다.
이 신작들의 주인공은 이젠 관록의 인디밴드로 일컬어지는 ‘어어부’의 보컬 뮤지션 백현진(44)씨다. 서울 청와대 근처 삼청로에 있는 피케이엠 갤러리에서 지난달 27일부터 시작된 그의 개인전을 두고 ‘침체됐던 페인팅(회화)의 새 돌파구를 보여줬다’는 호평이 들린다. ‘들과 새와 개와 재능’이란 제목이 붙은 이 전시의 출품작들은 폐부를 긁는 듯한 괴성이 터지는 백씨의 사운드 퍼포먼스 ‘면벽’과 함께 만나게 된다. 내걸린 회화, 드로잉 신작 25점은 20여년 미술과 음악, 영화, 연극을 넘나들어온 자유예술가가 사회,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다기한 기억들을 얽히고 설키는 선과 색들의 군무로 표현한 작품들이다.
2011년 두산갤러리 개인전 때 보여줬던 초점없고 싸늘한 인물화들에 비하면 이번 작업들은 불온한 느낌을 일부 간직하면서도 형상이 다소 뭉개지고, 음악과 퍼포먼스를 하면서 작가가 느꼈던 여러 감정들이 훨씬 진솔하고 부드럽게 표현되어 있다. 여러 색깔의 미세한 선들이 날카로운 선율처럼 이어지는 추상이 보이는가하면, 남녀가 포옹하는 장면의 실루엣이 비치거나 담벼락에 ‘씨발’ ‘갈겨’ 등의 자잘한 욕설을 휘갈긴 듯한 낙서 이미지들도 등장한다. 이런 야성이 상업화랑의 백색공간에 들어맞는 감각적 이미지로 휘발된다는 게 특이하다. 연초 영화음악가 방준석씨와 프로젝트 듀오 ‘방백’을 결성하면서 중견 뮤지션의 고빗길을 다잡은 작가는 이제 그림에서도 뜻한대로 느낀대로 칠하고 절규하면서 내공을 거침없이 공유할 수 있는 단계로 진입한 듯하다.
과거 서구 추상주의 사조의 흔적들을 선뜻 비치지만 작품이 진부해지지 않는 건 민감한 붓질이 남긴 자글자글한 선들의 흔적 덕분이다. 무언가 뚜렷한 형상성이나 거대담론을 표출하진 않지만, 야성과 괴기스러움이 살아있고, 백색 전시장에 자연스럽게도 녹아드는 유연함도 엿보인다. 상류층 고객과의 컬렉션 거래로 소문난 이 상업화랑의 새끈한 공간에서 붓질 자체로 이런 불온한 복선들을 조화롭게 펼쳐놓는다는 매력이 눈비비고 출품작들을 보게 만든다. 27일까지. (02)734-9467.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