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대 박물관이 소장한 이른 봄 매화 핀 남도 시골의 풍경을 담은 1954년작 ‘일출이작(日出而作)’. 전통 남종산수화법에 바탕하면서도 실제 이땅의 경치를 더욱 부각시켜 또다른 흥취를 자아낸다. 도판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텁텁한 황토 냄새가 난다. 물기 뺀 먹으로 깔깔하게 붓질한 야트막한 들녘과 둥글둥글한 산, 구불구불한 강줄기의 모습은 바로 이땅 남도의 정겨운 풍경이 아닌가.
한국 화단 최후의 전통 문인화 거장으로 손꼽는 의재 허백련(1891~1977)의 산수화에는 밋밋하면서도 소담한 호남 산하의 정취가 흠뻑 배어있다. 강진, 해남 등을 찾아가면 볼 수 있는 황톳빛 구릉과 들녘, 고즈넉한 천과 호수의 풍경들이 짙고 묽은 먹과 담채를 입고 등장한다.
실경·관념 조화된 남종화 대가
전통 회화 최후의 거장 꼽혀
깔깔한 붓질로 고즈넉한 풍경 담아
의재 종합적 회고전은 처음
과거 중국과 조선 문인들이 마음 속으로 그려냈던 남종화라는 전통산수의 품격을 함께 드러낸다는 것이 특징인데, 실경을 담되 성찰하며 그리는 관념 산수라는 점이 묘미라고 할 수 있다.
국립광주박물관에 마련된 ‘전통회화 최후의 거장 의재 허백련’ 전(21일까지)에서 이런 의재 특유의 작품세계와 발자취를 한눈에 살펴보게 된다.
의재는 추사 김정희, 소치 허련에서 비롯된 조선 문인화의 맥을 정통으로 이어받으며 근현대기 남도화단을 일으켜세운 주역이다. 19세기 추사 수제자였던 소치 허련과 아들 미산 허형, 손자 남농 허건과 더불어 남도화단의 주축인 허씨 가문의 거장으로 추앙받지만, 전시가 잦았던 소치, 남농과 달리 의재의 종합적 회고전은 이번이 처음이라 의미가 각별하다.
의재는 인복을 타고났다. 8살때 진도에 귀양온 대학자 무정 정만조에게 한학과 글씨를 배웠고, 10대 때 추사와 소치의 예맥을 이은 미산에게 그림을 익혔으며, 일본에 유학해 일본남화의 대가 고무로 스이운의 화풍까지 전수받았다. 이런 경험을 거듭하며 추사가 추구했던 전통 문인화 정신에 바탕해 새로움을 닦는 온고지신의 길만이 개성을 이룩하는 첩경이라고 깨닫게된 의재는 평생 시서화를 겸비하고 차를 사랑하는 선비작가의 삶을 살았다. 이런 의재의 그림인생을, 전시는 집안, 스승·교유관계, 작품세계, 제자 등 네 영역으로 망라했다.
의재의 1953년작 ‘산수’. 밋밋한 언덕과 산이 강을 따라 이어지는 남도의 전형적 경관이 녹아들어간 대표작이다. 화폭 오른쪽 위의 글은 그림의 유래 대신 남종화 연원을 논한 문인 동기창의 화론으로, 의재가 직접 옮겨 쓴 것이다. 도판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고갱이는 역시 산수화다. 들머리벽에 붙은 53년작 ‘산수’는 강과 언덕, 산이 멀리 이어지는 남도 풍경이 원숙한 필치와 색감에 녹아들어있는 대표작이다. 화폭 상단에 풍경에 대한 글 대신 남종화의 연원을 논한 명나라 문인 동기창의 화론을 옮겨 써서 마음의 뜻, 문기를 중시하는 남종화의 신봉자였음을 드러낸다. 화단 데뷔작격인 1922년 1회 조선미술전람회 2등 수상작 ‘추경산수’의 도록과 20년대 초기 산수화인 ‘계산정취’, 본격적으로 자기 화풍을 추구하던 40년대 답사 스케치를 거쳐 완성한 ‘금강산도’ 병풍, 말년 산수화 소재를 집대성한 ‘춘설헌심화첩’ 등의 대작들이 이어진다. 남도 특유의 소재인 대나무와 동백을 팔색조와 함께 그린 ‘사계화조’ 8폭 같은 화조화, 절지화 등에도 남도의 토속적 정취가 묻어나온다. 잘 알려지지 않은 글씨 작품들도 다수 나왔는데, 까칠하면서 힘찬 느낌을 주는 마른 먹글씨 ‘홍익인간’과 타계 직전 병상에서 쓴 ‘시’ 등은 두루 서체에 통달했던 의재 서예의 진수다. 말미에는 30년대 광주에 세운 연진회와 해방 뒤 무등산 자락의 작업실 춘설헌을 통해 키운 후대 제자들 작품들이 다수 나왔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산수대작 등의 일부 주요작들이 빠진 탓인지 후학들 작품이 지나치게 넓은 공간을 차지하면서 의재의 작품 전시가 중간에 멈춘 듯한 아쉬움도 남는다. (062)570-7000.
광주/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