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디자인’전에 나온 길종상가의 디자인 설치작업 ‘3차원 세계의 화답’. 일민미술관 제공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 전
소규모 스튜디오 공방 10여곳
독창적 활동과 고민의 과정
이미지들의 단편으로 펼쳐내
소규모 스튜디오 공방 10여곳
독창적 활동과 고민의 과정
이미지들의 단편으로 펼쳐내
‘요세미티 산에서 외골수 표범이 흰 사자와 우두머리 호랑이를 뛰어넘는다’? 지금 서울 광화문 일민미술관 1층 전시공간 구석에는 이런 난해한 제목 아래 애플 매킨토시 컴퓨터의 배경화면들을 짜깁기한 광고판 화면이 펼쳐져 있다. 오로라, 남극, 사막, 설산, 사자, 성운 등이 뒤섞여 악몽처럼 초현실적이면서도 장엄한 느낌을 주는 인공 풍경이다. 그 옆에는 2000년대 서울을 알리는 1회성 홍보물들이 수십미터짜리 길쭉한 사물함 속에 가득 채워져 관객을 맞는다. 전시장 한 가운데엔 콘크리트를 입힌 큰 종이 수십여장을 한 기둥에 꿴 설치작품 ‘빌딩’이 다른 작품들을 굽어보고 서있기도 하다. 2층과 3층에서는 책의 단면을 거대한 물건처럼 클로즈업한 사진과 공짜로 가져가는 포스터들이 든 유리함, 디자인 강좌를 담은 동영상들도 작품으로 나와있다.
정체를 붙잡기 힘든 이 전시의 이름은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이다. 기획자인 최성민, 김형진씨는 출판물, 도록 등에서 그래픽 디자인 예술을 구현해온 디자이너들이다. 그들은 전시장의 모든 작품들이 그래픽 디자인의 과정과 맥락을 이야기한다고 말하는데, 정작 그래픽 디자인이 반영된 전시도록이나 책, 잡지의 완성본은 보이지 않는다.
기획자들의 문제의식은 복잡하지 않다. 사람들은 ‘그래픽 디자인’하면 대개 현란한 볼거리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적지않다. 대개 신문과 잡지, 책 등의 내용을 돋보이게 하려고 넣는 튀는 이미지 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 인식을 깨려는게 이 전시의 의도로 비치는데, 그 배경엔 지난 10여년 사이 서울에서 소규모 그래픽 스튜디오 공방들이 계속 생겨나 돋보이는 활동을 벌이면서 일궈낸 성과물들이 있다.
‘그래픽 디자인…’전은 이런 작은 디자인 스튜디오들이 출판, 미술, 사진 등 2000년대 한국 시각문화 전반에 남긴 자취와 그들의 고민들을 색다른 경로로 보여준다. 그들이 창안해온 이미지들의 자잘한 단편들을 통해서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작가적 속내를 두루 조망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기획자인 최성민씨와 김형진씨 또한 ‘슬기와 민’, ‘워크룸 프레스’라는 디자인 공방에서 두각을 드러낸 작가들이다. 두 작가의 주관적 관점이 들어간 서울 지역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의 10년 흔적이 전시로 만들어진 셈이다.
참여작가는 길종상가, 사사(Sasa)·이재원, 김성구, 설계회사, 더북 소사이어티·테이블유니온·COM 등 12개 팀. 이들은 완성된 작품 대신 스스로 텍스트이미지 예술가로서 생각하고 고민해온 여러 개념과 이미지들을 평면·설치·영상 등으로 풀어냈다. 기획자들이 10년간 이 공방들에서 창안한 그래픽 디자인 작품들 가운데 중요하다고 평가하는 사례 101점을 골라 참여작가들에게 출품작의 소재로 다시 해석하게 한 점도 흥미롭다. 그간 미술과 출판의 딸림 작업 정도로 여겨졌던 그래픽디자인이 최근 독창적인 장르영역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음을 실감할 수 있다. 5월29일까지. (02)2020-2038.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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