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음악·공연·전시

대가들의 버려진 사진에 뚫린 검은구멍을 엿보다

등록 2016-05-23 19:34수정 2016-05-24 15:46

펀치 구멍이 뚫린 작가 벤샨의 ‘재정착민 가족’ 연작(1935)중 일부. 눈 부분에 뚫려버린 검은 구멍이 불길하고 섬뜩한 느낌을 안겨준다. 사진도판 갤러리 룩스 제공
펀치 구멍이 뚫린 작가 벤샨의 ‘재정착민 가족’ 연작(1935)중 일부. 눈 부분에 뚫려버린 검은 구멍이 불길하고 섬뜩한 느낌을 안겨준다. 사진도판 갤러리 룩스 제공
갤러리 룩스의 ‘폐기된 사진의 귀환: FSA 펀치 사진’전

30년대 미국의 농촌실상 홍보용
예술적 등 주관적 판단으로 펀칭
배제의 과정 ‘섬뜩한 충격’ 드러내
1970~80년대 통속잡지 <선데이서울> <주간경향>의 풍속기사에는 테이프 붙이듯 검은 줄로 사람들 눈을 가린 배경사진이 종종 실리곤 했다. ‘사진은 특정 기사 내용과 관련 없다’란 코미디 같은 설명도 덧붙었다. 등장인물의 신원을 가리려는 꼼수였지만, 서슬 퍼런 당국의 검열 앞에 민감한 기사 내용을 나름 희석시키려는 의도를 띠고 있기도 했다.

그때 그 시절 사진이 절로 연상되는 70~80년 전 미국의 펀칭 사진들이 서울 서촌 옥인동 갤러리 룩스에 나왔다. 사진이론가 박상우 중부대 교수가 이영준 계원조형예술대 교수의 자료 제공으로 기획한 ‘폐기된 사진의 귀환: FSA 펀치 사진’전이다. 출품작들은 1930년대 대공황기 미국 농업안정국(FSA)이 기획한 사진 프로젝트 결과물 가운데 기준 미달로 낙인찍힌 작품들이다. 농업안정국은 당시 빈곤한 농촌 실상을 기록하고 정부 시책을 알리기 위해 워커 에번스, 벤 샨, 도러시아 랭 등 당대 유명 사진가들을 동원해 사진을 찍게 한 뒤 홍보용으로 활용했다. 이 과정에서 당국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불량 사진’들에 마구잡이로 검은 구멍을 뚫는 펀칭을 해서 버린다는 표시를 한 것이다. 사실 이 사진들은 농촌의 평화로운 정경이나 힘겹게 살아가는 농민, 빈민들의 일상과 노동을 평범하고 솔직하게 담고 있는 게 대부분이다. 당시 사진을 솎아내는 작업을 주도했던 경제학자 로이 스트라이커는 흐릿하거나 완성도가 떨어지는 사진뿐 아니라 사람들이 정면을 바라봐 작위적 느낌이 난다거나 사진이 너무 예술적이라는 등의 주관적인 이유를 앞세워 사진 프린트에 ‘펀칭질’을 했다.

이 전시를 보는 재미는 그런 요소보다는 ‘별 볼 일 없다’고 판명되어 철컥 펀칭하고 버리려던 사진들이 70여년 지나 전혀 다른 의미로 바뀌어 다가온다는 데 있다. 유명한 사회파 화가였던 벤 샨이 찍은 정착민 가족의 여인의 오른쪽 눈에 철컥 찍힌 펀칭은 섬뜩한 충격 그 자체다. 농장의 하늘, 시골 읍내 시장, 밭을 경작하는 농부들 사이, 농가 아이들 가슴팍에도 도사리듯 쿡쿡 찍힌 검은 구멍 혹은 점들은 한없이 불온하고 불량하며 불안한 기호로 다가온다. 당대엔 배제의 낙인이었지만, 이제는 사진을 초현실적인 화폭으로 탈바꿈시키는 촉매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잡지, 책, 신문 등에서 대중과 공유되는 사진은 숱하게 찍은 필름, 디지털 화상들 가운데 극소수가 낙점돼 세상에 나온다. 전시장의 펀칭 사진들은 이 선택과 배제의 과정이 충격적으로 드러난 실례다. 기획자 박상우 교수는 “사진의 모든 과정에 개입하는 선택을 시각적으로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들이란 게 전시를 기획한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고 했다.

일부 관객들은 사진에 필수적인 선택과 배제의 과정을 왜 한국과 동떨어진 70여년 전 미국의 기록사진들, 그것도 아카이브로 묻혀 있던 것들을 새삼 끌어와 이야기하느냐는 물음을 던지기도 한다. 사실 한국이야말로 독재정권 시절 사진과 글, 공연, 전시 등이 가혹한 검열로 삭제, 축출되는 수난을 겪어왔고, 지금도 검열 시비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나라다. 미국 정부의 아카이브에 보관된 이 펀칭 사진들을 내려받기에 앞서 70~80년대 보도지침 등의 제약 아래 가위질당하거나 언론 내부에서 자체검열당했던 비보도 비공개 사진들의 실상을 먼저 추적해야 하지 않았을까. 다큐사진가 이한구씨는 “보기 드물게 독특한 사진 미학이 인상적이지만, 미국의 버려진 옛 사진들을 놓고 지금 우리 사진계의 신선한 담론처럼 전시를 풀어낸 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평했다. 6월4일까지. (02)720-8488.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