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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비밀의 방과 조선후기의 책가도 그림은 한뿌리?

등록 2016-06-16 17:02수정 2016-06-16 21:25

서예박물관 문자도·책거리전
19세기께 그려진 호피장막도(삼성미술관 리움소장). 표범 가죽 그림 일부를 후대에 뜯고 선비의 서재 풍경을 다시 그려넣은 독특한 얼개의 작품이다.
19세기께 그려진 호피장막도(삼성미술관 리움소장). 표범 가죽 그림 일부를 후대에 뜯고 선비의 서재 풍경을 다시 그려넣은 독특한 얼개의 작품이다.
16세기 르네상스 문화의 본산으로 꼽히는 이탈리아 북부의 우르비노 궁과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저택에는 ‘호기심의 방’이라는 숨은 명소가 있었다. 세상의 진귀한 수집품과 서책들을 잔뜩 모아놓고 지인들에게 과시하는 거대한 서재 공간이었다.

당대 ‘스투디올로’라고 불렀던 이 서재 방은 메디치 공이나 몬테펠트로 공 같은 당대 유력자들이 세상과 물질의 모든 것을 알고싶어하는 열망에 싸여 만든 것으로, 후대 박물관과 미술관의 원형이 된다. 당대 서양 예술가들이 삽화와 회화로 앞다퉈 묘사했던 이 희한한 공간은 흥미롭게도 200여년 뒤 조선 화원들이 그린 책거리 그림에서 거의 비슷한 서재의 풍경들로 다시 나타났다. 격자서재에 책이나 골동서화를 쌓은 장면을 부각시킨 ‘책거리 그림’ 혹은 ‘책가도’다.

왜 조선에서 르네상스 궁정 서재와 닮은 풍경을 그렸을까. 정병모 경주대 교수와 조이 켄세스 미국 다트머스대 교수 등 회화사가들은 근세기 동서교류 영향이 작용했을 것이란 설을 내놓는다. 서양선교사들이 명, 청나라 궁정에 들어가 ‘비밀의 방’ 같은 르네상스 특유의 수집·과시 취미를 퍼뜨려 비슷한 궁정그림들을 낳았고, 이런 회화 유행이 북경을 방문한 조선 사신(연행사)들에 의해 전해지면서 특유의 민화 책거리를 낳았다는 것이다. 특히 18세기 문예군주 정조가 학문정치의 일환으로 책가도를 용상 뒤에 내걸면서 더욱 널리 퍼졌다. 정조는 고결한 학문적 수양을 강조하려는 심산이었지만, 거꾸로 이 그림은 조선후기 짙어진 세속의 물질적 욕망, 과시욕과 더 잘 맞았다. 일상사물, 동물 등이 글자와 결합한 문자도나, 책과 골동품이 한묶음으로 그려지는 책거리 그림 등으로 속화되어 장르 분화가 일어났고, 심지어 오늘날까지 현대민화로 창작중이다. 물론 스투디올로와 책가도의 연관성이 확실한 물증으로 뒷받침되는 건 아니다. 낭만적 비약이란 반론도 있다.

19세기 화원 이형록이 그린 책가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책과 도자기, 꽃 등의 다양한 문물들을 차분하고 기품있게 배치한 구성의 격조가 돋보인다.
19세기 화원 이형록이 그린 책가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책과 도자기, 꽃 등의 다양한 문물들을 차분하고 기품있게 배치한 구성의 격조가 돋보인다.
지금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 차려진 ‘문자도·책거리’전은 근세기 동서교류에 얽힌 뿌리 논란을 알고보면 더욱 재미지게 다가오는 책가도 문자도 잔치다. 국내 주요 국공사립 박물관, 미술관, 현대화랑 등 20여곳이 소장한 책가도·문자도 58점이 나왔다. 서양 원근법과 사물의 여러 모습을 한 화면에 보여주는 입체파적 구도, 동식물·글자·서책이 한데 녹아든 시각적 상상력을 즐길 수 있다. 어둑어둑하게 암전된 들머리에서 선보이는 국립중앙박물관, 경기도박물관, 삼성미술관 리움의 소장품 대여섯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리움이 소장한 19세기 책거리 병풍 ‘호피장막도(虎皮帳幕圖)’는 표범 가죽의 점무늬를 그린 ‘호피도’의 일부를 후대 뜯어내고 선비의 체취가 깃든 서재 풍경을 그려 넣었다. 책을 읽다가 탁자 위에 문방구와 안경 등을 놓고 잠시 자리를 뜬 순간의 일상공간을 파격적 구성으로 드러낸 대표 명품이다. 정조가 발탁한 궁중화원이자 ‘책거리의 대가’라는 장한종의 ‘책가도’와 책으로만 가득 채워 추상적 기운이 더욱 강렬해지는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책가도’ 등도 처음 일반공개되는 희귀작들이다. 부귀다복에 대한 욕망이 기발한 구성미와 상상력으로 포장된 문자도, 책거리 소품들도 널렸다. 근대·전통화법의 경계를 휘젓는 책가도의 오묘한 매력을 새삼 깨닫게되는 자리다. 8월28일까지. (02)580-1300.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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