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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청자 역사 다시 쓰나…전라 산골에서 1000년전 벽돌가마터 출현

등록 2016-06-21 16:34수정 2016-06-23 10:22

전북 진안 도통리 옛 가마터에 학계 관심 집중
가마터 내부에서 출토된 퇴화햇무리굽 청자조각들.
가마터 내부에서 출토된 퇴화햇무리굽 청자조각들.
벽돌을 잇대어 붙인 가마의 소성실 내벽 모습.
벽돌을 잇대어 붙인 가마의 소성실 내벽 모습.
전북 진안군 도통리 중평마을에 있는 초기청자유적의 2호 가마터 전경.
전북 진안군 도통리 중평마을에 있는 초기청자유적의 2호 가마터 전경.
투명한 하늘빛으로 이름높은 고려청자의 역사가 바뀔 수 있을까. 한국 초기청자의 시원을 고려의 옛도읍 개성 부근의 경기, 황해도 일대 가마터로 꼽았던 학계 정설이 도전을 받게 됐다. 최근 남도 오지인 전북 진안군 산골 마을에서 초기 청자를 굽던 1000여년전 대형 가마터가 잇따라 드러나면서다. 이 유적이 국내 최고의 청자 생산유적인지를 놓고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달 15일 국립전주박물관이 국내 도자사 전문가들을 초빙한 가운데 발굴설명회를 연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증평마을의 1, 2호 청자가마터가 화제의 유적이다. 박물관 쪽이 올봄부터 발굴한 이 유적은 초기 청자를 생산한 벽돌가마터와 함께 초창기 청자 완, 갑발 등의 유물을 무더기로 쏟아냈다.

무엇보다 도통리 유적은 이전의 국내 경기권 일대의 초기청자 유적에서 볼 수 없던 독특한 특성을 보여준다. 학계에서는 고려 청자가 9~10세기 중국 당나라와 이후 오대십국시대 오월의 영향을 받아 서해안에 가까운 경기, 황해권 일대의 가마들에서 태동한 것으로 추정해왔다. 이와 달리 도통리 가마터는 초창기 청자 생산가마 형태인 중국풍의 벽돌가마가 남도의 산속지역에서 확인되는 첫 사례다. 마을 한가운데 누정을 헐고 그 아래를 파고 들어간 결과 드러난 가마터 길이만 21m다. 연소실(燃燒室), 소성실(燒成室), 출입시설 등을 갖춘 정교한 벽돌가마 얼개다. 불을 피우는 연소실은 돌로, 그릇을 굽는 소성실 안쪽 벽은 돌·진흙과 갑발(구울 때 청자에 덮는 용기)로, 바깥쪽 벽은 일부에 벽돌을 써서 정교하게 쌓았다. 벽돌과 진흙·갑발을 순차적으로 쓴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고려 청자 가마는 초기 벽돌가마에서 이후 진흙가마로 변화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세기 중국풍 벽돌가마에서 11세기 벽돌과 진흙가마를 섞어쓰다 진흙가마로 변천되면서 특유의 상감청자로 만개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도통리 가마터는 벽돌에서 진흙·갑발로 쌓는 재료가 바뀌는 과정을 현장 박물관처럼 한 곳에서 모두 보여주는 유일한 유적이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평가다. 청자는 고려 도읍 개경(개성)으로 바치던 진상품들이 주종이었다. 대개의 가마들이 바닷가나 가까운 내륙에 집중되어 있는데, 도통리처럼 멀리 떨어진 첩첩산중에 대규모 가마터가 자리잡은 것도 특이하다.

지금껏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청자생산 가마는 10세기 중반의 경기도 시흥 방산동, 용인 서리, 황해도 배천 등지 벽돌가마를 꼽아왔다. 도통리 가마터가 기존 가마들보다 연대가 더 올라갈 수 있는지가 쟁점이 된다. 이번 발굴 자문위원으로 참석한 이종민 충북대 교수나 한성욱 민족문화유산연구원장 등은 유적의 연대를 기존 가마와 비슷한 10세기 중반이나 좀 늦은 10세기 후반으로 보았다. 이 교수는 “가마얼개 측면에서 청자 생산시설이 진안에 들어선 뒤 토착화되어 가는 전파단계의 유적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발굴을 주도한 정상기 국립전주박물관 학예관은 가장 이른 초기 청자 가마일 가능성을 제시한다. “출토된 완의 햇무리모양 굽이 시흥 방산동이나 용인 서리 출토 햇무리모양 굽보다 시기가 빠른 특징을 보인다. 후속 발굴에 따라서는 시기가 올라갈 공산도 있다”는 것이다.

또다른 변수는 견훤이 세운 후백제와의 관계다. 곽장근 군산대교수는 한반도 초기 청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중국 월주요를 지배했던 오대시대의 오월 왕국과 후백제가 사신을 주고 받는 등 밀접한 관계였다는 점을 중시해 청자의 후백제 전래설을 제기하고 있다. 918년 견훤은 오월에 배로 말을 보내기도 했고 927년 오월 왕 전유도 사절단을 전주에 보낼 만큼 교류가 활발했다. 진안 산골에 대규모 가마를 조성했을 법한 현지 호족 세력의 실체가 역사적으로 알려진 게 없다는 점도 수수께끼다.

여러 쟁점과 의문을 풀 수 있는 실증적 단서들은 미발굴 가마터의 추가 조사에서 기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발굴 부분은 민가와 마을회관 등 마을 시설 아래 묻혀있고, 가마터는 도지정 문화재 목록에서도 빠져있는 실정이다. 이종민 교수는 국가 사적 지정과 체계적인 조사 지원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도판 국립전주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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