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만에 다시 무대에 오른 뮤지컬 <스위니토드>에서 열연 중인 양준모(왼쪽)와 전미도(오른쪽).
9년간의 예열을 마친 오븐에서 제법 잘 구워진 파이가 나왔다. 2007년 국내 초연 뒤 9년만에 무대에 오른 스릴러 뮤지컬 <스위니토드>(연출 에릭 셰퍼) 얘기다. 한입 베어물면 텁텁한 피맛과 함께 달콤한 체리맛이 동시에 느껴진다. 공포와 웃음, 비극과 희극, 정의와 부도덕, 불쾌한 욕망과 순수한 사랑을 기가 막히게 섞어 관객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간만에 국내 무대를 빛내는 수작이다.
28일 밤 서울 샤롯데씨어터 무대는 손드하임의 음악만으로도 꽉 채워진 듯 했다. 작곡가 스티븐 손드하임은 도발적이고 창의적인 음악으로 ‘뮤지컬계의 예술적 양심’으로도 불린다. 그는 1979년 초연을 준비하며 불협화음에다 귀를 찢을 듯한 금속성 소음, 심지어 가톨릭 장례에 사용되는 음악까지 넣어 <스위니토드>만의 불안하고도 기괴한 느낌을 완성시켰다. 상황과 노래의 부조화도 빼놓을 수 없다. 토드가 아련하게 딸 조안나를 부르며 고객의 목에 무심하게 칼을 들이대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1막의 마지막 ‘목사는 어때요?’는 극중에서 가장 유쾌한 넘버이면서 가장 끔찍한 대사를 담고 있다. 러빗 부인과 토드는 파이에 ‘넣을 만한’ 사람들을 고르며 "공무원 어때 아주 든든해/실속 넘치는 안전빵/정치인 뱃살 파이/도둑놈과 사기꾼을 섞은 맛"이라 노래한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영국 사회의 부조리를 꼬집는 장면이기도 하다.
스위니 토드 역의 배우 양준모(왼쪽)과 터핀 판사 역의 배우 서영주.
무대 연출과 배우들의 호연도 잘 맞아떨어졌다. 무대 장치라곤 흰색 벽을 배경 삼은 3층 철제 구조물이 전부다. 다소 휑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무대에 대해 신춘수 프로듀서는 “배우들의 드라마 흡인력을 높일 수 있는 실험적인 무대”라고 그 의도를 설명했다. 아내와 딸을 부패한 판사 터핀에게 빼앗기고 복수를 꿈꾸는 이발사 스위니 토드 역의 양준모는 초연 때도 같은 역을 맡았다. 절망과 분노, 광기로 이어지는 감정선을 살리며 묵직한 무게감을 발휘한다. 그를 돕는 파이가게 주인 러빗부인 역의 전미도는 이번 작품을 통해 또 한번 연기 변신에 성공했다. “염병도 참 고상하게 떠신다”“아이구 내가 기가 막히게 미친년이야” 등의 대사를 차지게 소화하며 적당히 부도덕하고 적당히 사랑스러운 여인을 그려낸다. <원스>(2014)에서 진중한 ‘걸’을 연기할 때와는 180도 다른 모습이다. 조승우와 옥주현의 ‘꿀조합’으로 공연 전부터 큰 화제를 모았지만 주거니 받거니 대사 궁합이 좋은 ‘양미도(양준모+전미도)’의 ‘케미’를 더 좋아하는 관객도 있을 것 같다.
2008년도 팀 버튼의 동명 영화보다 더 변태적으로 그려지는 터핀 판사 역의 서영주도 안정적인 연기력을 선보였다. 강렬한 앙상블은 인상적이었지만 발음이 부정확해 가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1막이 이야기를 충실히 풀어내는 데 비해 2막은 결말을 향해 조금 성급히 달리는 탓에 토드의 마지막 절규가 남기는 극적 감흥이 덜하다는 점도 아쉽다. 중학생 이상 관람가인데, 종종 ‘19금 유머’가 등장한다. 10월3일까지.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사진 오디컴퍼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