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낡은 서랍장 속에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꿈이 담겼다. 조선시대 궁궐과 관청, 백성들의 저잣거리를 떠돌았던 말과 글들을 선조들은 단단하고 아름다운 활자들로 빚어냈다. 튼튼하게 짠 서랍장에 넣고 수시로 꺼내 책과 문서를 찍으면서 후세에 전했다. 말글살이를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기강을 보존하는 것이라는 신념이 조선 특유의 강직한 인쇄 문화를 일궈낸 것이다.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상설관 1층 고려실의 한쪽 방에 들어가면 만나는 테마전시 ‘활자의 나라, 조선’은 그 실체를 보여주는 자리다. 박물관이 소장한 82만자나 되는 조선시대 금속·목활자들이 그들만의 별세계 속으로 관객을 이끌어간다.
조선왕조는 백성들에게 교훈을 전하는 책을 찍거나 칙령 등에 쓰이는 활자를 나라의 상징물처럼 중시해 제작과 보관에 각별한 공을 들였다. 이를 반영하듯 전시장에 들어서면 조선시대 활자 5만5000여자를 세로 8m나 되는 진열장 안에 배치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세계 최대 규모의 활자를 소장 중인 국립중앙박물관만이 내놓을 수 있는 풍경이다. 이 거대한 진열장 양옆으로 시기별 주요 금속·목활자와 이를 활용해 찍은 서적과 문서, 활자를 보관했던 서랍과 서랍장이 놓여 있다. 조선 초 태종의 계미자부터 가장 널리 활용된 세종 시기의 갑인자, 영·정조 시대의 한글 활자와 조선 말기의 철활자 등 다양한 크기와 모양새의 글자들이 이어진다.
활자전 전시장 모습. 정면에 5만여자의 활자들을 모아 부려놓은 거대한 진열장이 보인다.
특히 정조 시대 왕의 글인 윤음이나 칙령을 백성들이 알아보기 쉽게 하려고 만든 한글 목활자들이 눈길을 붙잡는다. 전통 궁서체로 만들어진 글씨들은 획이 정연하면서도 정겹고 넉넉한 미감이 있다.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이 자체로 찍어 강원도의 백성들에게 내린 정조의 윤음문서로 짐작하게 된다. 흉년이 든 강원도 백성의 세금을 감해준다는 내용이다. 정조가 수입한 청나라의 목활자는 현재 중국에서도 오래된 희귀 글자라고 한다. 격자로 칸을 갈라 들어갈 글자의 모양을 각각 종이 표찰로 써 붙여 분류한 서랍 내부와 글자를 쓰는 빈도수 등에 따라 서랍별로 들어가는 깊이를 다르게 짠 서랍장의 단정한 모양새가 각별한 감흥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재정 학예연구관이 수년 동안 문헌을 찾고 활자들을 분류하는 고투 끝에 옛 활자 활용 분류 방식을 찾아내면서 만들어낸 역작 전시다. 우리 활자문화사를 보여주는 역대 최고의 기획전으로 꼽을 만하다. 9월11일까지. (02)2077-9000.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