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민망하구먼. 문 신부님 작품은 꽃이고 내 것은 가랑잎이야.”, “허허, 백 선생 말씀을 거꾸로 뒤집어야 맞지요. 부끄러울 뿐입니다.”
지난 5일 저녁 서울 통의동 류가헌에서 개막한 ‘두 어른’ 전시회의 두 주인공은 마냥 수줍어했다.
비정규 노동자의 집 ’꿀잠‘ 건립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재야운동의 원로 백기완(84·오른쪽) 통일문제연구소장은 글씨 30여점을, 평택 대추리·제주 강정마을·용산참사 현장에서 삶터 지키기 싸움을 함께 해온 문정현(78·왼쪽) 신부가 새김판(서각) 70여점을 내놓아 작품 마당을 펼쳐놓았다.
두 어르신 모두 “작품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전시는 꿈도 꾸지 않았다”고 했지만, 자본의 폭압에 몸 누이고 치료하고 싸울 수 있는 외갓집 같은 쉼터를 만들고 싶다는 비정규노동자들의 간청에 용기를 냈다.
백 선생의 글씨 그대로 문 신부가 새긴 공동작업 3작품은 문 열자 마자 빨간 구매딱지를 받았다. ‘천년을 실패한 도둑’, ‘하늘도 거울로 삼는 쪽빛 아 그 거울처럼’, ‘산자여 따르라’.
두 어른은 “젊은 사람들에게 속았다”면서 서로 맞장구를 쳤다. “작가도 아니고 못한다고 거절했는데, 문 신부가 이미 내 글씨를 받아서 작업하기로 했다는 거야. 그래서 한달 넘게 감옥살이하듯 쪼그려 앉아 썼어. 괘씸한 놈들. 찍쭉이라고 알아? 점을 찍고 획을 쭉 긋는 서예를 민중은 그렇게 불렀어. 내가 찍쭉을 모르지만 비정규노동자들 꿀잠자는 데를 만든다는데, 뭐 거리낄 게 있을까 싶었어. 그래서 막 휘갈겨 썼지”(백기완) “평택 대추리 싸움에 함께 했던 젊은 서각 작가들한테 처음 배웠어. 몸을 놀려 글씨를 새기는 순간에 집중하다보면 화도 고뇌도 잠시 잊을 수 있었지. 그렇게 10년 시간 죽이려고 한 짓이어서, 손사래 치다가 백 선생이 함께 전시하려고 글씨를 쓴다는 말에 속았지 뭐.”(문정현)
한옥인 류가헌의 안채에는 백 선생의 글씨 액자들이, 바깥채에는 문 신부의 글씨 새김판들이 벽면 가득 걸렸다. 백 선생의 글씨는 ‘백발이 휘날리는 듯한’(박재동 화백) 다부진 결기가 넘치고, ‘당신의 심장을 쪼아대는 심경으로 파신 것’(송경동 시인)이라는 문 신부의 새김판은 소박하면서도 따뜻해 공감을 자아낸다.
꿀잠기금 건립 추진위가 서울 변두리에 터를 잡으려는 숙소 건립 모금액의 목표는 10억원. 지금까지 3억원이 모였고 이번 전시 기금을 보태도 한참 모자란다. 두 사람은 “작품 판매는 아무 의미가 없다. 노동자를 둘로 갈라놓는 지금 이땅의 자본주의 악덕 앞에서 더이상 견딜 수 없어 최소한 터전을 마련하는 노동자들에게 힘과 신화를 남겨주자”고 입을 모았다. “와서 보는 이들이 매일 라면 한 그릇 값이라도 아껴 나눴으면 좋겠어.”(백기완) 전시는 17일까지. (02)720-2010.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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