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스의 1937년 퇴폐미술전의 전시 형식을 본뜬 전시장 한켠의 모습. 노동 도구들을 전통 한국화 재료로 확대시켜 그린 정덕현 작가의 대작 그림과 이 작업들을 비난하는 문구가 함께 붙어 있다.
남성의 몸과 동성애 장면을 몽환적인 색감으로 보여주는 오용석 작가의 그림들. 이 작업들을 변태적 탐닉 등으로 비난하는 문구가 같이 붙어 있다. 나치스의 퇴폐미술전 전시 방식을 차용한 구성을 보여준다.
퇴폐미술전 전시장 전경. 안기부 구호가 적힌 권용주 작가의 스티로폼 조형물과 여성 주체의 성적 욕망을 격렬한 붓질로 표현한 장파 작가의 그림, 공감각에 대한 전소정 작가의 영상 설치작품이 보인다.
전시장 들머리에 설치된 권용주 작가의 ‘한나라당’ 현판 모각 작품.
1937년 독일 뮌헨에서 열린 나치스 정권의 퇴폐미술전 전시장.
이런 작품들을 왜 퇴폐미술로 갈라놨을까?
서울 구기동에 있는 전시공간 아트 스페이스 풀의 ‘퇴폐미술전’을 감상한 관객들이라면 대뜸 이런 의문을 갖는 이들이 적지 않을 터다. 청년작가 8명과 1팀이 낸 회화, 영상, 조각, 아카이브 출품작들 앞에 안소현 기획자가 붙여준 전시 제목을 보고 일말의 기대감(?)을 가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도입부부터 눈앞을 치받는 건 작가들의 의식, 감각의 심연에서 나온 모호하고 거친 이미지들이다. 말초적인 감각 대신 보는 이의 인내와 깊은 눈길이 요구되는 전시라는 것을 단박에 느끼게 된다.
전시는 권용주 작가가 스티로폼으로 만든 현관 들머리의 옛 ‘한나라당’ 현판과 안기부 구호석 기념비로 시작되는데, ‘저질 퇴폐’에 대한 사회통념적 시각으로는 재단하기 어려운 작품들의 연속이다. 묵은 권력에 대한 냉소를 허접한 재료에 담아 떠낸 권 작가의 가짜 권력상징물은 다분히 진부해 보이는 정치적 풍자물이다. 이에 비해, 곧이어 나타나는 첫번째 방의 그림들은 격렬하면서도 실체가 불분명한 작가 내면의 정서와 욕구를 분출하는 주관적 회화들이다. 적나라한 선홍색조의 살집 덩어리들 같은 여성의 몸이 관객 앞에 치부를 보여주거나 몸짓으로 육박해오는 장파 작가의 그림무더기들과 노랗고 푸른 빛으로 뒤덮인 남성 신체의 몽환적이고 창백한 자태들로 채운 오용석 작가의 연작들이 그것이다. 두 작가의 그림들이 붙은 첫방의 벽들은 작가들의 강퍅하고 육감적인 정서가 난무하는 무대미술처럼 보인다. 그 곁자리에 색과 소리의 관계, 공감각 등에 얽힌 일상의 이미지들이 프랑스시 낭송육성과 함께 흘러나오는 영상설치물(전소정 작가)이 쟁쟁거린다.
둘째 방은 더욱 난해한 수수께끼의 공간처럼 다가온다. 볼트, 너트 등의 공구와 화염 뿜는 드럼통 같은 노동현장의 모습들을 한국화의 수묵 화폭에 기묘한 구도로 확대해 그린 정덕현 작가의 대작들이 가장 깊은 안쪽 구석에 내걸려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앞으로 북한의 김정은 체제에 대한 찬양 이미지들을 유니콘 게임과 합성시켜 이념과 키치가 공존하는 잡탕영상물을 만든 김웅현 작가의 작업과 공터·건물과 숲 등 평범한 공간에서 시간의 흔적을 부각시킨 안경수 작가의 심심한 풍경그림들이 보인다. 작은 곁방엔 정신병적 증세를 보이는 이들의 알쏭달쏭한 대화가 공단의 밤풍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임유리 작가의 영상물들이 불길한 울림을 쏟아내고 있기도 하다.
이 복잡하고 야릇한 구도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건 출품작들을 배치한 모양새다. 주목도가 한참 떨어지는 벽 아랫부분이나 천장 가까운 위쪽에 의도적으로 작품을 내걸어 놓았다. 출품작들마다 작가의 의도와 작품 가치를 깎아내리며 비난하는 선전성 문구들이 도처에 함께 나붙어있다는 점도 특이하다. 사실 이 전시는 뚜렷한 역사적 모델이 있다고 한다. 기획자가 1937년 독일 나치스가 당시 현대미술을 공격하려고 꾸린 ‘퇴폐미술전’의 전시 방식에 주목해 당대 전시틀을 그대로 본떠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치스는 주관적 의식과 내면 표현을 강조하는 원시주의, 표현주의 등 모더니즘 계열 작가들의 활동을 반정부 작품 못지않은 정신적 오염원으로 간주하고 이제는 고전이 된 대가들의 작품 1만7000여점을 압수해 전시 뒤 불태우거나 경매처분해버렸다. 안 기획자는 “80년 전 나치스 전시를 패러디한 건 최근 검열논란 등으로 표현의 자유가 재론되는 상황에서 예술이 먼저 사회의 경직성과 편견을 드러내보자는 의도였다”고 말한다. “경직된 사회가 특정한 예술을 규제하려고 세운 전략만큼이나 작가들이 치밀하게 예술을 지키는 전략을 가지려고 노력했는지를 묻고 싶었다”는 것이다. 결국 ‘퇴폐미술전’은 80년 전 파시즘 정권의 선전전 틀거지를 감수성과 시대적 배경이 다른 요즘 작가들 작업에 끼워맞춘 형식으로 지금 시대의 청년미술의 정신성과 태도를 이야기한 셈이다. 관객 교감 측면에서 기획자의 취지가 성공적으로 전달되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그럼에도, 자본시장이 철저히 지배하는 지금 미술판에서 불온한 작품들에 더이상 주목하지 않는 한계상황을 기획자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보려했는 점이 또다른 생각거리를 던지기도 한다. 자기 작품들을 스스로 불온한 퇴폐로 규정하고 위악적인 몸짓으로나마 존재감을 일깨우고 싶다는 청년미술인들의 자의식이 느껴지는 까닭이다. 14일까지. (02)396-4805.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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