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후쿠시마의 폐허가 남긴 묵시록적 공간을 부유하는 원숭이 소녀의 움직임을 통해 더욱 섬뜩하게 부각시킨 피에르 위그의 영상 작품 <휴먼마스크>. 미디어시티서울 2016 비엔날레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나라의 중앙·지방 정부한테서 큰돈을 받아 그 돈을 낸 국민, 시민의 삶·일상·생각과 다소 동떨어진 전시를 꾸리는 것, 4차원적인 주제를 내걸고 잡동사니 구조물 등을 엮거나 난해한 영상물들을 만들어 거대 공간에 흩어놓고 과시하는 것, 미술인들이 경력 쌓기를 위해 헤쳐모였다가 끝나면 털고 잊어버리는 것. 2년마다 열리는 국제미술제로 2000년대 이후 우후죽순 생긴 국내 비엔날레들은 대개 이런 특징들을 띠면서 명맥을 이어왔다. 사실 지금 세계 미술계는 각 나라의 비엔날레 홍수에 넌더리를 낼 정도로 시선이 차갑다. 1980년대 이래 200개가 넘는 비엔날레가 도시들의 마케팅 욕망을 업고 창설돼 운영되면서, 나올 만한 담론이나 작품·전시 형식들은 30여년 사이 죄다 빤하게 노출된 까닭이다. 지난주 광주, 서울, 부산에서 잇따라 개막한 국내 3대 비엔날레는 이런 사정을 의식해 새로운 틀과 문제의식을 선보이려 애쓴 모습들을 보여줬다. 그런데 성과는 신통치 않다. 전시는 잘 보이지 않고 일부 출품작과 공간만 돋보이곤 했다. 현장에서 살펴본 세 도시 비엔날레의 특징과 눈길 가는 감상거리들을 간추렸다.
부산비엔날레의 프로젝트2에 선보인 이탈리아 작가 이벨리세 과르디아 페라구티의 행위 작업.
■ 도슨트가 꼭 필요하다 ‘해답이 없고, 작품들도 꿰지 못했다’. 2일 광주 중외공원 전시관에서 37개국 작가들의 출품작 200여점을 선보이며 개막한 ‘2016 광주비엔날레’ 본전시(11월6일까지)는 실패작이란 평가가 지배적이다. 12세기 페르시아 신비주의 철학자가 착상했다는 ‘제8기후대’란 타이틀도 논란이다. 스웨덴 출신 마리아 린드 총감독은 ‘현실에 없는, 예술만이 펼쳐내는 상상적 세계와 공간’이라고 정의했지만, 전문가들도 뭔지 모르겠다는 말들이 나온다.
루스 뷰캐넌 작가의 설치물인 쇠사슬 커튼을 걷고 관람이 시작되는 1~5전시장의 작품들은 회화, 설치, 영상, 벽화 등으로 외양은 다양하지만, 집중감상하기가 버겁다. 대부분 작품들이 묵직하고 장대한 내력들을 숨긴 것들인데도, 이를 풀어내거나 한 맥락으로 꿰는 구성의 묘미를 찾아보기 어렵다. 정해진 동선도 없어 해설사(도슨트) 설명 없이는 우왕좌왕하기 쉽다.
광주비엔날레 본전시에 나온 로런스 아부 함단의 설치 작품 <고무도포 강철, 마지막 어휘>. 팔레스타인 아이를 사살한 이스라엘군의 만행 당시 총이 발사되는 소리를 포착해 시각적으로 분석해 보여주고 있다.
광주비엔날레 1전시장에 나온 스페인 작가 도라 가르시아의 <녹두서점-산 자와 죽은 자, 우리 모두를 위한>. 1977년 설립되어 광주민주화운동의 거점 구실을 한 녹두서점의 내부와 책들을 재현했다.
광주비엔날레의 화제작 중 하나인 <나오키 하야카와의 잃어버린 꿈들>. 격무에 시달려 잠을 못 자고 환각에 빠진 일본 광고디렉터의 꿈 이야기를 보여준다. 북구 작가 아네 요르트 구투와 일본 작가 고스기 다이스케가 함께 만든 16㎜ 필름 영상 작업이다.
린드 감독은 현재와 미래의 미술이란 무엇인가와 미술의 사회적 실천 기능을 찾아본다는 취지를 내세웠지만, 그에 대한 미술적 대안이나 해답, 비평적 초점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지는 못했다. 개막 직전까지 설치 작품 배치를 계속 바꾸면서 작가들과 손발이 잘 맞지 않았다는 전언이다. 독일의 영상설치 대가 히토 슈타이얼은 기술 지원이 미흡하다는 이유로 작품을 놓지 않고 철수하기도 했다. 개별 영상 작품과 설치 작품 수작들을 집중적으로 둘러보는 게 좋다. 추천하는 공간은 3전시장. 비크 판데르폴의 설치 공간 <직선은 어떤 느낌인가>는 따뜻한 쉼터다. 광주인의 친근한 정서를 창호무늬 같은 무늬를 입힌 벽체와 전통 장판 바닥으로 된 구조물에, 사람이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파장의 램프빛 등을 통해 반영했다. 5월 어머니회 등 광주항쟁 유가족 모임의 공간으로도 쓸 예정이다. 북구 작가 아네 요르트 구투와 고스기 다이스케가 협업한 16㎜ 영상물 <나오키 하야카와의 잃어버린 꿈들>도 강렬한 공감을 일으킨다. 격무에 시달려 제대로 잠을 못 자는 광고디렉터가 꿈에 중독돼 만나는 환상의 세계가 팍팍한 일상과 뒤섞여 펼쳐진다. 전시장 뒷문을 열어둔 덕분에 중외공원 주변의 아스라한 오솔길로 이어지는 뜻밖의 산책도 가능하다. 답답한 가벽을 걷고 널널하게 전시장을 비운 4전시장의 영상, 추상 작품과 설치물들도 눈에 띈다. 로런스 아부 함단의 설치 작품 <고무도포 강철, 마지막 어휘>는 팔레스타인 아이를 사살한 이스라엘군의 만행 당시 총이 발사되는 소리를 포착해 시각적으로 분석한 독특한 작품이다. 스페인 작가 도라 가르시아가 1전시장에 재현한 1970~80년대 광주민주화운동 성지 ‘녹두서점’ 내부와 책장들도 둘러봐야 할 곳이다.
감정을 감추고 고객 앞에 대면하는 젊은 여성 노동자들의 전형적 상황을 재현한 주황 작가의 사진 설치 작업 <의상을 입어라>. ‘세마(SeMA)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출품작.
■ 깔끔하지만 희박하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1일부터 시작한 ‘세마(SeMA)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11월20일까지)은 종잡기 어려운 예술의 미래적 감성과 상상력을 이야기한다. 일본 시인이 상상 속 화성인의 언어라고 자작시에 표현한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를 전시 제목으로 삼았다. 그러나 일반 관객 입장에서 제목만 염두에 두고 보면 더욱 헷갈릴 법한 작품들이 많다. 백지숙 감독의 설명을 들어보면, 정치권력과 자본에 포박된 기존 비엔날레에 대한 문제의식을 깔고 문명이 파괴된 암울한 미래에 예술이 어떻게 새로운 시작을 보여줄 수 있느냐는 에스에프적 상상력을 다기한 작업들로 구현했다고 한다. 지구의 종말적 미래에서 재생하고 갱신하는 예술, 예술적 대안들을 보여준다는 것인데, 난해한 메시지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기존 비엔날레 매너리즘의 관성을 벗지 못한 측면도 여실하다. 1, 2, 3층의 판에 박힌 공간에서 세련된 전시 동선을 연출했지만, 전시는 이 비엔날레의 정체성인 미디어매체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고, 메시지의 맥락도 헐거운 느낌이다. 2년 전 미디어시티서울전 당시 박찬경 감독이 냉전을 표상하는 ‘귀신 할머니 간첩’이란 제목으로 기획한 전시 구성의 집중력을 떠올렸다는 반응들도 나왔다. 개별 수작들은 꽤 있다. 일본 후쿠시마의 방사능 폐허가 남긴 묵시록적 공간을 소녀가면을 쓴 원숭이가 떠돌아다니는 모습들을 통해 섬뜩하게 부각시킨 피에르 위그의 영상물 <휴먼마스크>와 세월호 유족들이 강당에 힘겹게 누워 휴식하는 이미지만을 포착해 낯설게 재현한 함양아 작가의 영상, 감정을 감추고 고객 앞에 대면하는 젊은 여성 노동자들의 전형적 상황을 응시한 주황 작가의 사진 설치 작품 등에 눈길을 줄 만하다.
부산비엔날레 2프로젝트가 펼쳐진 수영동 옛 고려제강 공장 내부의 전시장 모습. 조아나 라이코프스카의 영상작품 ‘내 아버지는 나를 결코 그렇게 만지지 않았다’가 보인다. ‘F1963’으로 이름 붙여진 이 재생 전시공간은 관객과 미술인들에게 큰 호평을 받고 있다.
■ 작품보다 공간이 좋다 2011년 베네치아비엔날레 한국관 예술감독 윤재갑씨가 총감독을 맡아 3일 개막한 올해 부산비엔날레의 주제는 ‘혼혈하는 지구, 다중지성의 공론장’이란 거대 담론이다. 하지만 올해 2월말에야 확정된 전시 주제보다는 고려제강이 윤 감독 제안으로 부산 수영동 옛 와이어(철선) 공장을 리모델링한 본전시(프로젝트2) 공간이 더 각광받는다. 이 옛 공장의 창립연도인 1963년을 따서 ‘F1963’으로 이름 붙여진 이 옛 공장은 3000평에 이르는 국내 최대규모 급 전시장이다. 윤 감독의 구상과 조병수 건축가의 설계로 새롭게 태어난 이 전시장은 무엇보다도 ‘세개의 네모’로 불리는 세 겹 공간이 가장 눈길을 끈다. 학술회의, 공연장 등으로 쓸 수 있는 중정을 한가운데 틔우고, 이를 둘러싼 내부 겹공간에 맥주 바와 커피숍, 바깥 겹공간에 전시장을 배치한 독특한 얼개다. 이곳에 선보인 프로젝트2 본전시는 이런 신선한 공간 덕분에 주목도는 높지만, 7달여 만에 급조된 티가 역력하게 난다. 다양한 장르를 아울렀지만, 전시 주제와의 연관성을 찾기 어렵고, 기기묘묘한 이색 미술품들의 박람회처럼 비친다. 이와 별개로 김찬동 경기문화재단 뮤지엄본부장이 기획한 프로젝트1은 50~60년대 이후 한국, 중국, 일본의 아방가르드(전위미술) 흐름들을 실물과 함께 엮은 미술사 교과서 같은 전시다. 현대미술의 새 방향이나 논쟁적 지점을 예시하는 비엔날레 본질과는 다른 전형적인 미술관 역사기획전 성격이다. 한국 전위미술의 60~70년대 희귀 영상물과 전위미술가 성능경, 이건용, 이강소씨의 알려진 수작들을 재현했고, 70년대 이후 중국 본토의 전위미술운동, 한국 단색조회화와 행위예술 등에 큰 영향을 미친 50년대 이후 일본 미술 흐름을 국내에서 처음 실제 작품들 중심으로 한자리에 펼쳐놓았다. 프로젝트 1, 2는 동시대 현대미술과 미술사기획전을 각기 걸맞는 공간에 풀어놓은 상반된 내용의 전시다. 하나의 비엔날레로 생각하지 않고 관람하는 게 좋다. 11월30일까지. 광주·부산/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각 비엔날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