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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황석영의 글자들이 암벽과 폭포를 훑으며 흘러간다

등록 2016-09-22 16:28수정 2016-09-22 20:32

장민승 작가 신작 아트시네마 <입석부근> 눈길
황석영 산악소설 문장과 토왕폭계곡 영상 만남
장민승의 신작 영상물 ‘입석부근’의 한장면. 황석영 데뷔 소설 <입석부근>에서 따온 주요 문장들이 눈보라 휘날리는 암봉계곡의 영상 속을 스치며 흘러간다.
장민승의 신작 영상물 ‘입석부근’의 한장면. 황석영 데뷔 소설 <입석부근>에서 따온 주요 문장들이 눈보라 휘날리는 암봉계곡의 영상 속을 스치며 흘러간다.
"돌은 모두의 출발점, 꽃들도 눈물도 투쟁도 모두 내일을 위하여… 그날, 아마 우리들은 함께 출발할 것이다."

1962년 <사상계>에 실렸던 황석영 작가의 데뷔작 산악소설 <입석부근>의 도입부 세로 문장이 배우처럼 퍼포먼스를 한다. 54년전 잡지의 문장 텍스트가 쪽수 표시와 함께 통째로 떠내어져 영상 속 화면을 천천히 흘러간다. 영상 속에서는 휭휭 거리는 바람소리가 들리고 나부끼는 눈발 너머로 거대한 암벽과 나무들이 자리잡은 설악산 토왕폭의 장엄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21일부터 서울 강남구 학동 전시공간 ‘플랫폼 엘’에서 상영중인 장민승(37) 작가의 신작 <입석부근>은 전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구도의 영상작업이다. 거대한 암봉을 오르내리면서 삶과 죽음, 휴식을 생각하며 자아를 확장해가는 소년 등산가의 몸 부대끼는 체험을 담은 소설속 텍스트가 숭고미 어린 자연환경과 만나 서로 어울리며 45분의 영상을 만들어낸다. 50년전 소설의 활자체들이 배우 구실을 하는 셈인데, 진경산수 혹은 대관산수의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대자연의 엄혹한 풍경과 조였다 풀렸다 하는 기타와 관악기의 장엄한 선율이 서로 얽히면서 강렬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거대한 암봉의 기세와 안개, 눈발, 그 사이 계곡 틈으로 얼어붙은 폭포는 숭고한 대자연의 위엄을 보여주지만 지금 청년세대가 처한 팍팍한 현실의 벽을 상징하는 것처럼 비치기도 한다. 지난 연말부터 올 2월까지 일반인 접근 금지지역인 토왕성 계곡을 직접 등반하며 카메라를 들이댄 작가는 작업 초반부 우연히 떠올린 소설 <입석부근>의 텍스트가 이 거대한 풍경과 딱 들어맞는다는 느낌에 전율했다. 작가는 곧장 소설 대목의 텍스트 활자가 수직의 암벽과 폭포 위를 횡으로 움직이는 장면을 떠올렸다고 했다.

초정밀 에이치디(HD) 촬영으로 잡은 ‘입석부근’의 정교하면서도 핍진한 영상들은 몸으로 누비며 움직여야 얻을 수 있는 이미지들이다. 18살에 등반 경험을 담아 쓴 젊은 황석영의 텍스트와 장비를 매고 암벽에 매달린 작가의 시선은 한몸처럼 밀착된다. 영상 중반부에는 "그의 허리에는 내가 잡고 있는 자일이 팽팽하게 매어져 있었다. 나에겐 그것이 둘의 혈관이라고 느껴졌다"는 문장이 흘러가고 영상 속에 폭포 얼음기둥 밑으로 물이 콸콸 흐르는 순간이 등장한다. 문장과 영상의 이미지가 온전히 합치되는 것을 실감하는 드문 경험이다.

작가는 장선우 감독의 아들로 영화의 음악감독, 코디네이터와 가구디자인, 사진을 두루 섭렵하며 내공을 쌓았다. 함양의 방재림 숲속에 빨려들어가는 듯한 영상물 ‘상림’으로 주목을 받았고 지난해 세월호 사건을 모티브로 검은 바다와 일본 하이쿠 싯구를 쓴 종이쪽이 등장하는 영상설치물 ‘검은 나무여’로 에르메스상을 수상했다. 자연의 원초적인 사물성을 체험해보고 싶어 한라산과 설악산을 올랐다가 뜻하지 않게 황석영의 초기 소설을 만나면서 또다른 영상미학의 성취를 이끌어냈다. 단짝인 정재일 음악감독이 촬영 종료 6달이 지난 뒤에야 내놓은 음악의 매혹도 몰입감을 낳는 요소다. 매일 5번 틀어준다. 관람료 1만원. (02)6929-4470.

노형석 기자, 도판 플랫폼 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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