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시의 대표작인 <무지개 집합>. 천장의 원형 분무기에서 분사되는 안개 같은 물방울들이 빛을 받아 무지갯빛 아롱진 환상적인 공간을 만들어낸다.
바람이 분다. 빛은 아롱지고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사방이 막힌 전시장에서 이런 자연현상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게 신비스럽다. 극지 가까운 아이슬란드에서 자란 현대미술가 올라퍼 엘리아슨(올라푸르 엘리아손)의 마법이다. 그는 자연에서 인류가 느끼는 감성을 전시장에 옮겨와 보여주고 느끼도록 해준다. 17세기 네덜란드의 바로크 거장 렘브란트와 페르메이르가 눈에 불을 켜고 당대 광학기기를 동원해 빛을 화폭 구석구석에 끌어들였듯이, 이 거장은 문명의 기계를 이용해 빛과 물로 빚어낸 21세기 미술의 신천지를 구현한다.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열리고 있는 엘리아슨의 첫 한국 회고전 ‘세상의 모든 가능성’은 평면, 입체란 기존 미술 장르의 영역 가름이 의미를 잃어버리는 전시다. 자연, 문명이 얽히고 부대끼는 모습을 실제 물, 공기, 빛으로 구체화한 구상의 과정들이 공간에 나타나서 관객과 만나며 완성되는 작품이다. 1층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와 습습한 냄새 속에 북국 아이슬란드의 순록이끼 설치작품을 볼 때부터 마지막 블랙박스 전시장에서 황홀한 오색 무지개의 이슬비를 맞을 때까지 관객은 작가의 재기 넘치는 공간적 발상과 과학, 예술, 철학을 넘나드는 지적 상상력을 즐기게 된다.
지하 전시장 중간에 매달린 ‘사라지는 시간의 형상’. 삼각형의 황동판들이 복잡하게 겹쳐진 ‘올로이드’란 기하학적 형상이 빛을 반사하면서 다양한 이미지들을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서로 상반되면서도 통하는 이미지들을 엿보는 게 전시의 재미다. 높이 6m에 폭이 약 14m나 되는 큰 벽에 아이슬란드산 순록이끼를 가득 붙인 <이끼 벽>은 야릇한 북국 설원의 이끼 냄새와 더불어 융단 같은 자연의 포근한 느낌을 선사하지만, 훨씬 안쪽의 <뒤집힌 폭포>는 펌프를 이용해 거꾸로 물이 솟구쳐 올라가는 형상을 통해 문명과 자연의 길항을 상징한다. 인간의 권력을 선이 감겨 올라가는 한쌍의 나선형 구조물로 표현하면서, 나선의 휘돌림이 적은 구조물에서 배려·돌봄의 힘을 찾는다고 설명한 대목이 이채롭다.
광학장치 프리즘에 거울을 붙인 뒤 매달아 빛을 받으면서 공간 속을 움직이게 하는 <당신의 미술관 경험을 위한 준비>는 관객의 위치에 따라 접하게 되는 이미지가 달라진다. 관객 모습이 얼비치는 천여개 유리구슬을 검은 화폭 앞에 매달아 이슬에 맺힌 삼라만상을 떠올리게 하는 <당신의 예측불가능한 여정>도 보는 이의 유무에 따라 비워짐과 채워짐을 되풀이한다. 압권으로 꼽히는 말미의 최신작인 <무지개 집합>은 천장의 원형 장치에서 안개처럼 분무되는 물방울들이 빛을 받으면서 보는 관람객의 위치마다 다른 이미지의 무지개가 되어 넘실거리는 작품이다. 각기 다른 위치에 선 관객마다, 각기 다른 마음과 생각들이 어울리면서 각기 다른 형상의 이미지로 끝없이 명멸하는 구도다. 이런 독특한 관람의 풍경 자체가 감성과 관점의 다양한 민주주의를 보여준다는 게 작가의 생각이다.
지하층 전시장 구석방에 있는 ‘당신의 미술관 경험을 위한 준비’. 공간에 매달려 빛을 받으며 움직이는 프리즘 고리로부터 반사되는 이미지들이 시시각각 다기하게 변모하며 시각적인 매혹을 안겨준다.
요사이 현대미술은 미술 자체의 속성을 강조해온 기존 모더니즘 담론 대신 과학기술과의 융합, 관객 소통 속에서 새로운 인공세계를 창출하는 작업들이 각광받고 있다. 르네상스, 바로크의 대가들이 당대 싹튼 과학기술의 성과들을 분석해 근대 회화의 서막을 연 것처럼 엘리아슨은 21세기 새로운 미술 공간을 만들어내려 애쓰는 대가라 할 수 있다. 현재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휘어진 거울상들을 전시중인 또다른 거장 아니쉬 카푸어의 깊고 텅빈 조형물 작업과 비교해보면 이성적이고도 명료한 엘리아슨의 세계를 더욱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다. 내년 2월26일까지. (02)2014-6901.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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