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기 작가의 2016년작 ‘홍지문’. 겸재 등이 진경산수 화풍으로 묘사했던 서울의 북악산 너머의 진산들과 현재 건물들이 들어찬 풍경을 종합적으로 한 화면에 부려넣었다.
원로의 나이에 접어든 화가 민정기(68)씨는 지난 20여년간 멀고 험한 길을 에둘러 다녔다. 1980년대초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음울한 독재시대의 현실을 반영한 이발소그림 풍의 도시·인물화를 그려 주목받았던 그는 88년 돌연 경기도 양평 동녘골로 작업 터전을 옮겼다. 그 뒤로는 우리 국토 곳곳의 산수와 삶과 역사의 흔적들을 짚는 답사에 몰두해왔다. 다기한 이 땅의 풍경들을 인문지리 공부로 시선 속에 다져넣는 노정이었다. 그렇게 그린 그림들이 쌓이자 작가는 80년대 주시한 도시 풍경을 화폭에 다시 꾸려넣기 시작한다. 20여년 전 출발점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9년 만에 서울 사간동 금호미술관에 차려진 민 작가의 초대개인전은 훨씬 풍성해진 회화적 성과를 안고서 그가 출발점에 돌아왔음을 일러준다. 2010년 이후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산과 강, 동네들의 진경들을 담은 출품작 유화 27점은 ‘보는 것’과 ‘아는 것’이 촘촘히 얽혀 이뤄낸 회화적 성채라 할 만하다. 80년대 모더니즘의 시선으로 도시와 세상을 파고들었던 작가는 조선 후기 거장들의 진경산수와 옛 고지도의 화법을 답사로 익힌 20여년 편력을 거쳐 이제 시대와 삶을 부여잡은 21세기 한국풍경회화의 일가를 보여주고 있다.
근작들은 유유하게 떠다니는 시선으로 국토 특정 장소들의 기억과 역사, 현실들을 하나의 화폭 속에 모두 담아내려 한다는 점에서 기존 풍경화들과 단연 구별되는 특장을 드러낸다. 특히 1, 2층에 내걸린 서울 풍경 근작들(대부분 올해 그렸다)이 가장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는 수작들이라고 할 수 있다. <홍지문>은 겸재 정선이 진경산수 화풍으로 묘사했던 서울 북악산 너머의 계곡, 진산들과 콘크리트 건물들이 계곡 사이로 들어찬 풍경들을 한 화면에 몰아넣은 작품이다. 겸재의 거칠고 활달한 선의 산세 묘사와 폴 세잔의 구축적인 채색과 구도가 한데 어우러진 듯한 화면 속에서 서울 북촌의 수려한 자연과 현재 도시의 난개발 양상이 얽혀든 풍경이 나타난다. 골기 어린 암산과 무분별하게 들어선 현대의 건물, 아래쪽에 위축된 듯 놓인 홍지문이 가로놓여 과거, 현재 사이의 마찰과 곡절을 암시하는 듯하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 사이로 보이는 북악산을 보면서 그린 <홍제동 옛길>은 인상파적인 터치로 묘사된 골목 벽면의 허연 반사광이 시각적 생동감을 일으킨다. 뒤틀린 고가도로 아래쪽에 웅크린 옥천암 마애불상을 그린 <옥천암 백불>이나 아스팔트 진입로 정면에 있는 사직단 정문과 주변 산세를 담은 <사직단> 등은 사실적 묘사에 바탕하면서도 현대적 구조물의 기괴하게 변형된 몰골과 화면 속에 출몰하는 파란 색점, 행인들의 생생한 움직임, 표정 등이 오버랩되며 산세와 어울리고 있다. 현재 풍경의 틈새로 과거 기운들이 불쑥불쑥 배어나오는 이 그림들은 전통 화풍을 의식한 선과 색채의 복합적 이미지를 통해 현재의 서울 공간 이면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굴곡을 암시한다.
서울 풍경 외에도 임진나루에서 시작되어 서산, 화암사, 경주 남산, 경기 양평 산촌 등에 이르는 작가의 여러 근작 회화들은 분단과 국토개발의 상처, 산촌에 어린 호랑이 전설 등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서사를 머금고 있다. 눈에 들어온 세상의 모든 것을 그림 속에 넣겠다는 부질없지만 비장한 욕망이 발현된 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특히 하늘, 산야 등의 색조를 격자 모양으로 겹쳐 붓질하면서 디지털 사진의 픽셀 이미지처럼 정연하게 비치도록 시각적 효과를 낸 것은 작가의 풍경이 그냥 사생이 아니라 눈과 발, 머리가 따라가는 지적인 경험의 산물임을 드러내는 단서다. 사연 많은 땅의 도상들을 회색, 연둣빛의 화면 속에 꽁꽁 다져넣은 건 관객들이 풍경을 서서히 풀어보면서 이 땅의 역사를 관조하게 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실제로 작가는 이런 회화적 욕구와 지향을 화폭에 나름 풀어내기 위해 과거 그림대가들과 내면의 대화를 계속해왔다고 한다. 겸재와 표암 강세황, 단원 김홍도 등의 대가들은 물론이고, 연객 허필처럼 세간에 생소한 18~19세기 문인들의 작품과 글들도 최근 산천 답사와 함께 즐겨 섭렵해왔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15세기 화가 안견의 걸작 <몽유도원도>에 지금 주택가 광경이 맞닥뜨려진 <유 몽유도원도>나 고지도풍의 <양평 수입리>처럼, 과거 지적되었던 전통화 도상의 과도한 몰입 같은 한계들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그럼에도, 근작들은 색채와 필선이 더욱 견고해졌고 이미지들이 지닌 현실성의 층위 또한 깊어져서 작가의 시선이 이 땅의 뜨겁고 잡다한 현실 속으로 한층 다가오리란 것을 예감하게 한다. 전시 개막날 만난 황지우 시인은 “작가의 그림 자체가 시간이 됐다. 아니, 시간 속으로 들어가버렸다”고 기뻐했다. 11월13일까지. (02)720-5114.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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