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는법’전에 나온 김상돈 작가의 영상설치작업 ‘솔베이그의 노래’(2011).
서울 경복궁의 서쪽문인 영추문 일대는 숱한 정변과 사건들이 스쳐지나갔던 역사와 전통의 공간이다. 문 앞길은 청와대로 올라가는 권력의 길이면서 가을이면 가로수 낙엽이 쌓여 세월의 정취를 일으키는 산책의 길이 된다. 지금 문 앞길 도로 건너편에 있는 2층짜리 화랑 ‘인디프레스’에서도 미술 속의 전통과 역사를 살펴보는 전시판이 차려졌다. 자기 안의 전통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거나 암시한 작고, 중견, 소장작가들 24명의 작품들이 1, 2층의 좁은 공간 안에 옹기종기 나붙거나 놓였다. 진보미술 진영의 든든한 이론가인 이영욱 전주대 교수가 우리 미술 속 숨은 전통을 그대로 직시해보자는 취지로 꾸린 기획전 ‘앉는 법’의 풍경이다.
대부분 소품들이지만, 마냥 보기 좋은 이미지들이 아니다. 잔혹하거나 소란스럽고, 불길하거나 불온한 기운을 내뿜는 센 작품들 일색이다. 알루미늄 판위에 알록달록한 자동차 도료를 뿌려 우주의 만다라를 구현한 유휴열 작가의 평면작품이 들머리 진열장에 들어선 것부터 예사롭지 않다. 1층 안으로 들어가면, 털이 듬실듬실한 호랑이의 엉덩이와 남성의 엉덩이가 부유하듯 떠오르는 이은실 작가의 그림과 꿈 속의 환각을 재현한 듯한 김지평 작가의 <관서팔경>, 바닥에 깨어진 거울이 물그릇 속에 담긴 권용주의 가변설치 작품 <지하봉제무지개> 등이 관객을 긴장하게 만든다.
전시의 제목은 시인 김수영(1921~1968)이 1964년 지은 대표시 ‘거대한 뿌리’의 첫머리에 나오는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는 구절에서 따왔다. 김수영은 시에서 전통과 근대 사이 방황하는 자아를 표출하며 지인들과 술마실 때 앉음새를 고치는 불안을 말하지만, 결국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고 말미에 고백하게 된다. 시인이 숙명처럼 따라다니는 전통의 그림자와 기질을 ‘거대한 뿌리’라고 내뱉은 것처럼, ‘앉는 법’ 전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전통이 지금 한국현대미술에 어떤 그늘을 드리우는지를 다기한 소품들을 통해 살펴본다.
추사 김정희의 문인화 ‘부작난’을 현대 서민의 상상력으로 풀어낸 박이소 작가의 헐렁한 ‘풀’ 그림과 한국인이 지닌 강인한 생활 에너지를 형상화한 최정화 작가의 소쿠리 탑, 행락객들의 놀이 영상과 소음, 도시 현장에서 수집한 각종 잡동사니 조형물들이 잡탕된 김상돈 작가의 설치물 등이 한국현대미술의 ‘거대한 뿌리’를 여러 갈래로 투영해준다. 절집의 심야풍경을 담은 박찬경 작가의 사진이나 어두운 숲 속에서 수박을 퍼먹는 과거 장삼이사들의 모습을 담은 조습 작가의 사진들에서는 전통이 지금 작가들에게 미친 심령적인 영향도 엿보게 된다.
근대 채색화대가 박생광의 드로잉부터 최근 한국화 신예작가들의 발칙한 내면그림들에 이르기까지 예민한 감각과 구도로 전통이 변용된 작품들을 선별해 담론을 이끌어내려한 기획자의 예지가 느껴진다. 퀭한 눈의 인물군상 그림을 내건 백현진 작가는 “강렬한 기운을 발산하는 작품들이 다닥다닥 붙은 전시장에서 전에 없던 후련함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11월8일까지. www.facebook.com/INDIPRESS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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