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문화가 있는 날’ 행사의 일환으로 2014년 8월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상명대학교 상명아트센터에서 열린 융복합 공연 ‘하루(One Day)’를 관람하기에 앞서 무대에 올라 인사말을 하고 있다. 왼쪽은 차은택 공연 총연출자, 오른쪽은 사회자 허경환. 이 공연은 견우와 직녀의 만남을 주제로 했다. 청와대 페이스북 갈무리
2014년 8월27일 오전, 서울 상명대 상명아트센터에 공연 하나가 오릅니다. 이 공연은 여러모로 특별합니다. ‘융복합 뮤지컬’이라는 생소한 장르가 일단 눈길을 끕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관람하고 칭찬한 공연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또 하나, 이 공연은 8월27일 이날을 끝으로 다시 무대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뮤지컬계의 ‘희귀템’이 된 공연의 이름은 ‘원 데이’.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에서 최씨 못지 않게 핵심인물로 꼽히는
차은택 광고감독이 총연출을 맡았습니다. 그는 삼성전자 ‘애니콜’ 광고 등으로 유명세를 탔고, 이승환·싸이·이효리 등 인기 가수들의 뮤직비디오를 찍기도 했습니다. 가수 백지영의 노래 ‘사랑 안 해’ 작사가이기도 하더군요. 그런 그가 전통 설화 ‘견우와 직녀’ 이야기에다 연극과 무용, 영화와 뮤지컬을 융복합시킨 공연을 선보인 겁니다. 공연을 본 박 대통령은 “문화 융복합 첫걸음이라는 데서 의미가 큰 공연”이라며 문화예술계를 이끌어 나갈 젊은 예술가들의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격려했다고 합니다.
이 공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뮤지컬 <원 데이>는 ‘문화계 황태자’로 불리며 문화체육관광부의 각종 사업과 인사 개입, 미르재단 운영 의혹(
▶관련기사 문화융복합 사업 주무른 ‘실세’…“대통령과 매달 한차례 회의”)을 받는 차씨가 공식 직함을 달고 처음으로 나선 자리입니다. 공연 하루 전인 2014년 8월26일, 대통령 소속 문화융성위원회는 가수 설운도씨와 차은택 감독을 신규 위원으로 위촉한다는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차씨가 민간인을 벗어난 하루 만에 공연을 연 셈인데요, 이 공연은
차씨와 박 대통령이 함께 사진이 찍힌 첫번째 행사이기도 합니다.
그 뒤 차씨는 2014 인천아시안게임 개·폐회식 영상감독을 맡고, 2015년 4월에는 창조경제추진단장 겸 문화창조융합본부장으로 발탁되며 승승장구합니다. 같은 해 열린 이탈리아 밀라노 엑스포 한국관 총괄 감독을 맡기도 했는데요, 이와 관련해 주간지 <시사인>은 차씨가 2014년 말 청와대로 들어가 박 대통령을 직접 만나 업무보고를 했고, 그 뒤 차씨가 전면에 나서게 됐다고 보도(
▶관련기사 [단독] “차은택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하기도 했습니다. 2014년 8월21일 차씨의 대학원 스승 김종덕 홍익대 교수가 문체부 장관에 임명됐고, 12월에는 차씨의 외삼촌 김상률 숙명여대 교수가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자리에 앉았습니다. 공연 전후로 차씨 인맥들이 본격적으로 정부 요직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인데요, 여러 의미에서 이 공연은 차씨에게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중요한 자리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최근 종합편성채널 <채널에이>는
공연 6일 전 문체부가 국고 1억7890만원을 긴급 지원했다고 보도(
▶관련기사 [단독]차은택 뮤지컬에 ‘억대’ 긴급지원 )하며
‘특혜’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지원금 신청 13일 만에 국고가 지원됐는데 보통 한 달 전에 준비하는 것에 비교하면 ‘번갯불’에 견줄 정도로 이례적이었다는 겁니다. 문체부는 공연을 공동제작한 융복합 문화예술축제 ‘파다프(PADAF)’쪽이 교부신청서를 제출했다고 해명했지만, 파다프 관계자는 이를 부인하며
“전적으로 차씨 쪽이 진행했다”고 밝혔습니다.
국고가 2억원 가까이 지원된 이 공연, 과연 그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뮤지컬 <원 데이>는 별도의 예매 절차 없이 예술 전공 대학생과 신진 예술가, 일반인 등 700여명을 초청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온라인 검색 끝에 초청권을 받아 뮤지컬 <원 데이>를 봤다는
한 누리꾼의 후기(클릭)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국내 연극·뮤지컬 후기가 가장 많이 올라오는 한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2014년 8월28일 저녁 8시35분에 올라온 글입니다.
그는
“무료가 아니었다면 연출가를 붙잡고 멱살을 흔들었을 것”이라며
‘총체적 난국’이라고 썼습니다.
“한 시간이 정말 길게 느껴졌다…배우들 노래가 놀랍게도 라이브가 아닌 녹음이었다…관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고도 했습니다. 박 대통령의 말과는 크게 거리가 먼 의견입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실망시켰던 걸까요.
이 누리꾼은
부실한 연출을 지적했습니다. 일년에 단 하루, 하늘의 문이 열릴 때만 만날 수 있는 남녀의 안타까운 사랑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한 이야기 전개가 지루했고, “아! 심장이 왜 이렇게 두근거리지” 같은 대사를 반복해 유치하게 느껴졌다고도 합니다. 융복합 뮤지컬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영상이 공연과 겉도는 점도 지적합니다.
뮤지컬 ‘원 데이’ 한 장면. 한국방송 뉴스 갈무리
공연에 대한 추가 정보를 확인하려고 했지만 어쩐 일인지 이 공연은 예술경영지원센터가 발간한 <2015 뮤지컬 실태조사>의 ‘2014 뮤지컬 작품 리스트’에 빠져 있습니다. 단 하루만 공연했기 때문일까요? 예술경영지원센터 리스트에는 2014년 9월13일 경기도 김포에서 하루 공연한 작품도 포함돼 있습니다. 심지어 뮤지컬 <원 데이>는 대통령이 직접 관람하고 칭찬한 작품입니다. 차씨가 위원으로 있었던 문화융성위원회가 올해 1월 공개한 <문화융복합 현황 기초조사>에도 뮤지컬 <원 데이>는 보이지 않습니다. 뮤지컬 제작사 대표 등에 물어봐도 뮤지컬 <원 데이>를 들어본 이를 찾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짐작가는 게 하나 있긴 합니다.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차씨는 2014년 8월8일 ‘아랍에미리트와의 문화 교류 제안서’를 만들고 18일에는 민간인 신분으로 안종범 당시 정책조정수석과 아랍에미리트로 출국(
▶관련기사 ‘직함 없이 특사역’…차은택, 임명 미스터리 풀렸다)합니다. 21일 귀국해서는 ‘UAE 한국문화원 설립 제안서’를 만들어 청와대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최순실씨가 자필로 쓴 메모에 따른 것이라는 보도(
▶관련기사 최순실 계획대로 안종범 수석·차은택 UAE 갔다)까지 나온 상황입니다.
직함도 없이 ‘한류 특사’ 역할을 하느라 바쁜 와중에 과연 뮤지컬 연출에 어느 정도 공을 들였는지 묻고 싶은 지점입니다.
업계에 정통한 한 뮤지컬 관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융복합 뮤지컬은 말이 안 된다. 뮤지컬은 원래 무용, 연극 등 다양한 장르가 융합된 장르다. 굳이 융복합이라고 붙인 것은 수사를 앞세워 정부기금이나 공공자금을 빼돌리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비주얼 테크놀로지, 컬처 테크놀로지 같은 표현도 마찬가지다. 립싱크가 만약 사실이라면, 라이브 엔터테인먼트라는 뮤지컬만의 장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또 뮤지컬은 지속적인 공연을 통해 콘텐츠로서의 가치가 생기는데 단 하루만 공연하고 말았다는 것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11월1일, 검찰은 차씨가 대표로 있는 아프리카픽쳐스와 엔박스에디트, 실소유주 의혹이 불거진 광고기획사 플레이그라운드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차씨의 현재 행적과 거취는 묘연합니다. 마치 그가 무대에 올렸던 뮤지컬처럼 말이죠.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