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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이 답답한 가을 분출하는 거장의 원색과 만난다

등록 2016-11-16 16:48수정 2016-11-16 21:21

한국 추상미술의 대가 유영국의 명품 그림들 한자리에
덕수궁미술관 탄생 100주년 사상 최대규모 회고전
개인소장품 중심으로 보기 힘든 60년대 걸작 추상그림들 대거 나와 눈길
빛덩어리 등이 분출하는 원색 화면 일품…초창기 사진과 아카이브 망라
유영국의 1965년 작 <작품>.(개인소장) 고향 울진의 산과 하늘을 모티브로 삼아 색채에 대한 격정이 터질 듯 발산되는 60년대 걸작 가운데 하나다.
유영국의 1965년 작 <작품>.(개인소장) 고향 울진의 산과 하늘을 모티브로 삼아 색채에 대한 격정이 터질 듯 발산되는 60년대 걸작 가운데 하나다.
황홀한 발광이다. 화면의 원색들은 빛덩어리가 되었다. 설원의 아득한 흰빛과 수직선으로 치솟은 산의 푸른빛, 솟아오른 태양의 벌건 용틀임이 서로 얽혀 화면 속에서 약동한다. 이 현란하면서도 차분한 격정이 어떻게 화폭 속에서 하나로 뭉쳐나왔을까.

김환기(1913~1974)와 더불어 한국 추상미술 초창기의 양대 거장으로 꼽히는 유영국(1916~2002)의 60년대 대작들은 보면 볼수록 경이로운 물음을 불러 일으킨다. ‘작품’으로 이름붙여진 60년대 초중반 연작들은 자체발광한다는 느낌이 날만큼 색감이 강렬하고 역동적이다. 추상적으로 변형된 대자연 풍광이 카오스 상태 같은 무정형 화면 속에 녹아들어 유동하는 필치 속에 은은한 빛무리로 나타난다. ‘광물질이 유동하는 듯하다’는 평들이 나왔던 이 60년대 수작들을 두고 미술사가들은 마크 로스코 같은 서구 추상거장들의 작품 못지않은 밀도감을 지녔다고 상찬한다.

대부분 개인소장품이어서 볼 기회가 흔치않았던 유영국의 60년대 걸작 30여점이 처음 한자리에 나왔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서 선보이고 있는 탄생 100주년 전 ‘유영국, 절대와 자유’다. 일본 유학중 화단에 데뷔한 1937년부터 마지막 작품을 남긴 1999년까지 60여년간의 작품 100여점을 망라해 선보이는 이 전시는 96년 호암갤러리 회고전의 맥을 잇는 역대 최대규모 전시다.

감상의 초점은 절정기의 불가사의한 산물로 알려진 60년대 유화작품들을 중심으로 이 수작들이 태어난 창작 배경을 더듬어보는 재미라고 할 수 있겠다. 경북 울진의 천석꾼 부호 집안에서 태어난 유영국은 여느 전위작가와 달리 평생 모범생처럼 추상그림을 연마하며 작업에 몰두했다. 해방 뒤 둥지를 튼 서울 약수동 좁은 작업실에서 말년까지 아침 6시에 일어나 저녁 8시까지 그리는 작업을 거듭하고 2년마다 한번씩 개인전을 하는 규칙을 벗어나지 않았다.

1968년께 서울 약수동 화실에서 작업하던 유영국의 생전 모습. 임응식 사진가가 찍었다.
1968년께 서울 약수동 화실에서 작업하던 유영국의 생전 모습. 임응식 사진가가 찍었다.

그는 청년 시절 도쿄 문화학원에 유학해 김병기, 이중섭, 문학수 등과 동문수학하며 자연 사물을 격자 구도 속에 추상화시킨 몬드리안의 영향을 받았다. 초창기 작업도 골판지, 판자를 덧대어 격자풍의 기하학적 화면을 만든 것이었다. 그랬던 작가가 태평양 전쟁 중 울진으로 귀향해 어업과 양조장 일을 하다가, 해방 뒤 ‘신사실파’ ‘모던아트 협회’ 등을 통해 추상작업을 재개하면서 화풍이 일변한다. 50년대말부터 현란한 원색의 색채가 만발하는 뜨거운 화면이 등장한 것이다.

당시 국내 화단을 지배한 무정형의 추상미술 사조인 앵포르멜의 영향도 지적할 수 있겠지만, 산과 하늘 물빛이 선연하게 갈라지는 고향 울진의 시각적 체험이 핍진하게 반영되었다는 분석이 설득력이 있다. 산과 하늘, 들녘, 태양 같은 조형적 요소들이 녹, 황, 적, 청 등의 원색을 입고 드라마틱한 구도로 펼쳐지는 화면의 변화는 쉽게 예단해 설명하기 힘들다. 70년대초부터 작가가 산과 태양 등을 삼각형과 원 등의 기하학적 요소로 재해석하면서 논리적인 화면으로 스타일을 바꿔, 숨질 때까지 이어갔다는 점을 감안하면, 60년대 그의 전성기 작업들은 더욱 돌올한 성취로 비친다. 70년대 중반 심장질환 등으로 30여차례 수술받고 심장박동기를 달고 다니게 된 것은 체력과 혼기를 온전히 60년대 색채추상에 쏟아부은 후과일 것이다.

작가의 초창기 사진 작업인 <경주불국사대웅전>. 1941~1942년께 찍은 것이다. 유영국은 유학시절 사진에 심취해 포토콜라주 작업들을 전시에 내놓기도 했고 경주의 문화유산들도 즐겨 앵글에 담았다.
작가의 초창기 사진 작업인 <경주불국사대웅전>. 1941~1942년께 찍은 것이다. 유영국은 유학시절 사진에 심취해 포토콜라주 작업들을 전시에 내놓기도 했고 경주의 문화유산들도 즐겨 앵글에 담았다.

전시장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30~40년대 사진 아카이브들도 처음 나왔다. 유학시절 일본 작가 무라이 마사나리, 하세가와 사부로의 영향을 받아 사진학교를 다니면서 전시에 내놓았던 전위적인 포토 콜라주 작업과 경주 남산, 불국사 등의 고적들을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들이다. 전통, 전위를 더불어 고민하며 청년기 회화적 방향성을 고민했음을 짐작케하는 단서들이다. 60대 이후 정갈한 톤으로 그린 숲과 겹쳐진 산곡의 추상화된 그림들은 원숙한 색감으로 위안을 안겨주기도 한다. 기획자 김인혜 연구사는 “평생 철저히 자기 삶을 규율하면서 절대적 자유와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그에게 추상은 삶의 비극을 제거하는 유일한 통로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3월1일까지. (02)2022-0600.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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