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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촌토성 백제역사의 중심으로 귀환하다

등록 2016-11-27 19:39수정 2016-11-27 21:35

한성백제박물관 최근 올림픽공원안 토성 유적 발굴
대형도로와 저습지, ‘官’(관)자명 토기 발견 등 왕성급 유적 유물 쏟아져
풍납토성과 함께 이중 도성 형성했다는 학계 추정 뒷받침
별궁인지 본왕성인지 규명이 앞으로 과제
한성백제박물관이 조사중인 몽촌토성 북문터 일대 유적 발굴 현장 전경. 올림픽공원 동북쪽 능선의 사면에 자리잡고 있다.  사진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한성백제박물관이 조사중인 몽촌토성 북문터 일대 유적 발굴 현장 전경. 올림픽공원 동북쪽 능선의 사면에 자리잡고 있다. 사진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북문터 안쪽 1호 도로와 2호 도로 사이에서 드러난 저수조 추정 유적. 파내려간 바닥 쪽의 개흙층과 나무틀 구조물 조각(오른쪽)이 보인다.  사진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북문터 안쪽 1호 도로와 2호 도로 사이에서 드러난 저수조 추정 유적. 파내려간 바닥 쪽의 개흙층과 나무틀 구조물 조각(오른쪽)이 보인다. 사진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도로유적 근처의 구덩이 유적(수혈유구)에서 나온 ‘官’(관)자가 새겨진 토기 조각. 토성 안의 관청이나 관영공방에서 만든 고급품으로 추정된다. 왕성급에 필적하는 몽촌토성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된다.  사진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도로유적 근처의 구덩이 유적(수혈유구)에서 나온 ‘官’(관)자가 새겨진 토기 조각. 토성 안의 관청이나 관영공방에서 만든 고급품으로 추정된다. 왕성급에 필적하는 몽촌토성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된다. 사진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북문터 안에서 나온 바둑알 모양의 토제품. 흙을 빚어 만든 것으로 구체적인 용도는 알 수 없다.  사진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북문터 안에서 나온 바둑알 모양의 토제품. 흙을 빚어 만든 것으로 구체적인 용도는 알 수 없다. 사진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몽촌토 북문터 안쪽에서 출토된 말머리뼈. 저수지의 기우제 제사 때 쓴 제물이란 설이 나온다.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몽촌토 북문터 안쪽에서 출토된 말머리뼈. 저수지의 기우제 제사 때 쓴 제물이란 설이 나온다.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아래 묻혔던 몽촌토성이 다시 고대사의 중심으로 돌아올 것인가.

2013년부터 한성백제박물관이 조사중인 초기백제 시대(1~5세기)의 유적인 몽촌토성의 북문터에서 최근 주목할 만한 발굴 성과가 쏟아지면서 고고학계의 관심이 몽촌토성의 실체 찾기에 쏠리고 있다. 올해 3~11월 조사에서 국내 고대유적 가운데 최대급인 전체폭 13m의 대형 인공도로와 ‘官’(관)자가 새겨진 토기 조각, 대형 저수조 흔적, 집터 등의 왕성급 유적, 유물이 잇따라 확인됐기 때문이다.

몽촌토성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전후해 83~89년 올림픽공원 정비를 위한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당시 성터와 문터, 시설터 등이 부분적으로 드러나면서 초기백제의 도읍이자 왕성터로 먼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90년대말 북동쪽 한강변에 있는 풍납토성이 제사시설터와 높이 10m가 넘는 거대 성벽 유구 등의 실체를 드러내면서 왕성터는 풍납토성이란 설이 유력해졌다. 몽촌토성은 유사시 왕실이 피난하는 배후성 혹은 풍납토성과 도성 일부 기능을 나눠 맡은 이중성의 일부로 위상이 쪼그라들었다. <삼국사기> <일본서기> 등을 보면, 백제는 한산 혹은 한성이란 이름으로 남성과 북성을 도읍으로 두었으며, 5세기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 당시 북성이 먼저 함락되고 백제 개로왕은 남성으로 도망쳤다가 고구려군에 붙잡혀 살해됐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런 문헌기록을 토대로 학계는 북성을 풍납토성, 남성을 몽촌토성으로 추정해왔다.

이번 조사 성과는 최근의 통설들에 다소간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단서들을 드러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가장 큰 성과는 다섯 군데가 확인된 삼국시대의 도로터다. 특히 북문 쪽에 근접한 1호 도로는 폭이 13m에 이르는 거대한 인공도로인데, 백제인들이 폭 9.7m의 중심도로를 조성한 뒤 그 옆으로 폭 2.7m 정도의 도로를 후대 고구려인들이 덧대어 확장한 3차로로 드러났다. 이 도로들은 모두 격자형의 얼개여서 정연한 도시계획을 세워놓고 닦았던 것으로 보인다. 1호 도로의 경우 북문 바깥쪽에서 직진하다가 700m 떨어진 풍납토성으로 향하는 북서쪽 축으로 휘어진 것으로 확인돼 두 성을 잇는 나라의 큰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도로 근처의 구덩이 유적(수혈유구)에서 나온 ‘官’자가 새겨진 토기 조각은 ‘경천동지할 만한 유물’(권오영 서울대 교수)이란 평가가 나왔다. 목 짧고 아가리가 곧은 4~5세기 백제 중심부 토기인 직구단경호 항아리의 어깨 부분인데, 성 안의 관청이나 관영공방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왕성급 유물인 ‘대부’(大夫)명 토기와 같은 종류다. 이런 유적, 유물들은 몽촌토성이 풍납토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왕성급 유적임을 일러준다. 쏟아진 토기들이 기대, 삼족기 같은 백제 고급 토기들이 많고 지방·중앙양식의 토기들까지 망라해 나온다는 점도 그렇다. 왕궁터는 아직 안 나왔지만, 두 토성 모두 중심 도시 구실을 했다는 게 뚜렷해진 셈이다.

이달 15, 16일 현장을 본 발굴 자문위원들이 1호, 2호 도로 사이의 흙 쌓은 공터(성토대지)가 식수, 방화수를 담는 대형 저수조일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을 낸 것도 예사롭지 않다. 유적 토양이 대부분 펄에 가까운 개흙인데다, 저수조를 구획한 듯한 나무기둥 등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추가 발굴에서 이런 추정이 사실로 확인되면, 5세기 이전 국내 고대 도성 안에서 저수조가 처음 발견된 사례가 된다. 유적 근처에서 말의 머리뼈와 복숭아 씨앗들이 나온 점도 저수조 가능성을 짙게 한다. 권오영 교수는 “고대 일본의 저수지 제사 유적을 보면, 말머리, 복숭아를 바친 흔적들이 나타난다”며 “정밀발굴하면 글씨가 쓰인 목간이나 유기물 같은 타임캡슐 유물들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후대 고구려인들이 도로를 덧댄 흔적과 고구려계의 토기류 등이 나온 점도 의미심장하다. 학계에선 고구려인들이 5세기 백제 정벌 뒤 몽촌토성을 재활용했는지가 오랜 쟁점이었는데, 재활용설에 힘이 실리게 됐다.

풍납토성 발굴 이래 학계는 주된 도읍성, 왕성 기능은 풍납토성이, 방어 및 별궁 등의 기능은 몽촌토성이 분담하는 이중 도성의 투트랙 체제를 유지했을 것으로 추정해왔다. 이번 발굴 결과는 크게 ‘이중성’설을 뒷받침해주지만, 왕궁과 별궁이 두 도성 가운데 어디에 있었는지는 여전히 파악되지 않아 추가 조사 결과가 더욱 관심을 모을 전망이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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