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코르뷔지에 특별전 전시장 도입부에는 거장의 주요 건축물 사진들을 배치한 방이 있다. 그의 최고 걸작인 프랑스 롱샹 성당의 대형 사진이 보인다.
1950년대초 롱샹 성당을 설계할 당시 성직자들과 논의중인 르코르뷔지에의 생전 모습.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 남아 전해지는 건 오직 사유뿐이다.’
4평 남짓한 오두막 거실 안에서 길쭉한 탁자에 팔을 기대며 현대건축의 아버지 르코르뷔지에(1887~1965)의 명언을 떠올려본다. 작은 창 안으로 포말이 부서지는 지중해 파도의 영상이 비쳐 들어왔다. 창 너머 영상 스크린 아래 바닥엔 방석들이 점점이 뜬 섬처럼 놓여 있는 풍경도 보인다. 1950년 지어 65년 그가 수영 도중 심장마비로 최후를 맞을 때까지 지냈다는 니스 부근 오두막집의 복원 공간 안에서는 거장의 눈길을 추체험하게 된다. 평생 인간을 위한 자유롭고 시적인 공간을 원했던 그의 욕망과 생각들이 비감한 분위기로 전해져오는 것이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 디자인미술관에서 6일 개막한 특별전시 ‘르코르뷔지에: 4평의 기적’전의 풍경은 여느 건축전과는 크게 다르다. 투기로 치달은 한국의 아파트 건축의 모태가 된 현대 대형 집단주거의 창안자이자, 20세기 세계 건축과 현대 도시계획에 거대한 영향을 미친 거장의 자취를 낯선 그림 수백점과 그가 생전 짓고 살았던 공간 체험을 중심으로 풀어내는 까닭이다.
전시는 스위스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나 숱한 여행과 평생에 걸친 데생, 그림 작업들을 통해 건축의 혁신적 영감을 이끌어낸 거장의 삶과 예술정신의 내면적 변화를 8개 섹션으로 담는다. 르코르뷔지에는 1층을 기둥만 남기고 틔운 ‘필로티’와 자연정원을 ‘옥상’에 옮긴 근대 건축의 5원칙, 기둥과 얇은 바닥판으로 구성한 조립식 구조의 주택 개념 등을 창안한 대가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탁월한 화가이자 조각가였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드물다. 전시장에서는 유년 시절부터 뛰어난 필력을 보인 그의 풍경화와 반추상, 추상 작품 300여점과 함께 건축모형, ‘팩시밀리’라고 불렀던 주요 건축도면, 영상, 조형물, 조각들을 전시해 건축 세계의 내면을 좀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려 한다.
르코르뷔지에의 1928년작 유화 ‘고양이와 부인, 그리고 차 주전자’(부분). 순수주의 유파를 표방한 그의 회화적 특징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미술학교 등에서 수학한 10대와 20대 청년 시절 그린 희귀한 수채 드로잉이 특히 눈길을 사로잡는다. 학생 시절이던 1905년에 그린 ‘숲의 도식화 연구’가 먼저 주목된다. 반추상적 블록 구도로 재배열된 나무들의 배치와 미묘한 색채감이 드러나는데, 그의 스승이던 레플라트니에가 보고는 건축가가 되라고 권유한 계기가 되었던 작품이다. 1911년 동방여행 당시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열주를 그린 수채 드로잉은 그가 평생 가장 열광했던 건축물과의 첫 만남을 담고 있기도 하다.
1920~30년대 순수주의 예술운동을 벌였던 시절의 유화 작품들이 전시의 핵심적인 볼거리다. 오직 사물의 본질적이고 단순한 면만을 강조하는 특유의 화풍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그의 건축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그림 편력의 시기다. 알프스 산맥의 산자락을 각진 묘사로 표현한 드로잉이나, 1928년작 유화 ‘고양이와 부인, 그리고 차 주전자’(부분) 등에서 순수주의 유파를 표방한 그의 회화적 특징이 잘 드러난다. 말년 어머니의 모성애와 부인 이본의 사랑을 갈구하면서 그린 작품들은 페르낭 레제의 구성주의 화풍이나 피카소의 입체파 후기 화풍을 풍성하게 수용한 느낌도 자아낸다.
르코르뷔지에가 생전에 썼던 팔레트와 안경, 담배 파이프 유품들도 선보이고 있다.
건축 작품으로는 그가 주창한 현대건축 5원칙을 처음 반영한 대표작 ‘빌라 사부아’와 빛과 유기적인 콘크리트 구조물의 앙상블로 최고 걸작이 된 만년작 ‘롱샹 성당’ 모형, 그리고 여러 주택 작품의 도면들이 등장한다. 말미의 4평짜리 니스 오두막 공간과 더불어 그의 건축적 태반을 엿볼 수 있는 자리지만, 수백점의 회화, 조형물이 전시장을 가득 채운 탓에 건축 공간의 미학을 기대한 이들에겐 미진함이 느껴질 수 있다. 내년 3월26일까지. 입장료 성인 1만5000원. (02)532-4407.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르코르뷔지에 재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