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가 이윤엽 작가가 8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궁핍현대미술광장'에서서 광화문 캠핑촌 작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텐트에 들어가면 춥지 않습니다. 스마트폰으로 뉴스나 티브이를 보다 잠들죠. 늦잠은 못 잡니다. 텐트 옆에 바로 차가 지나가는데 소리가 너무 커요.”
목판화가인 이윤엽(49) 작가는 지난해 11월4일부터 두달 넘게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텐트 노숙을 하고 있다. 텐트 안을 들여다봤다. 스티로폼이 텐트 바닥은 물론 반원형 상단 전체를 두르고 있다. 이불과 침낭으로 추위를 달랜다. 이 노숙 투쟁의 불꽃을 댕긴 것은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정책이다. 시인 송경동 등 장기 텐트 노숙자들은 대통령이 물러날 때까지 노숙을 이어가겠다는 각오다. 이 작가를 지난 8일 광화문광장에서 만났다.
방한모자를 눌러쓴 페인트공 차림의 행색이 눈밭을 뒹굴어도 끄떡없을 것 같다. “광장의 터줏대감이 된 것 같다”고 하니 그는 “정말 그렇다”며 환하게 웃는다. 2006년 대추리부터 시작된 그의 예술 투쟁 이력을 보면 이해가 어렵지 않다. 대추리 땐 2년 동안 투쟁 현장에서 눌러살았다. 용산참사 땐 동료 미술가들과 아예 파견미술팀을 꾸려 민중과 함께했다. 광화문 캠핑촌에 들어오기 직전엔 경남 거제의 조선소 하청노동자 싸움 현장을 지켰다. 그의 이름은 익숙지 않아도 용산 싸움 때 목판화인 ‘용산 여기 사람 있다’, ‘연꽃 든 사람’이나 최근 탄핵정국에서 포토샵으로 만든 작품 ‘질서있는 퇴진’ 등을 눈여겨본 이는 많을 것이다.
그의 작품엔 세상과 인간의 본질과 만나려는 안감힘이 강렬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지난해 그의 판화를 적잖은 돈을 주고 구입한 이유일 것이다. “제 이름은 블랙리스트에 없더라고요. 아내는 포함됐고요. (명단을 확인하고) 둘이 마주보고 의미있는 미소를 지었죠.”
그는 2012년 ‘구본주 예술상’도 받았다. 선정위원회는 그를 두고 “우리 시대 예술행동의 최전선에 서 있는 예술가”라고 했다.
광화문 캠핑촌 예술가들은 지난해 말 광장에 갤러리 ‘궁핍현대미술광장’을 열었다. 그의 작품 50점이 전시되고 있다. “전시 이후 30점 정도 팔렸어요. 평소보단 엄청 많이 팔린 셈이죠.”
그는 고교 졸업 뒤 3년 동안 극장 간판 작업을 했다. “그때 3년은 지금 30년과 맞먹어요. 19살이었어요. 체력도 자신 있을 때여서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세상이 너무 재밌었고 행복했죠.” 25살 때 수원대 미대에 들어갔다. “4년 동안 학생회 활동만 했어요. 회장 선출까지 대학이 좌지우지하려고 해서 너무 화가 났어요.” 3학년 때 미술대 학생회장이 됐다. 학교와 맞서 승리한 것이다.
왜 목판화였을까? “전 민중적인 놈이에요. 또 극장 간판 작업을 해서 그런지 평면으로 그리면 (상투적인) 민중미술이 돼요. 마치 북한애들 그림처럼요. 그게 싫었어요. 그래서 그림을 포기할까도 고민했죠.” 대학 졸업 뒤 전통찻집을 연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찻집에서 시간이 남아 목판을 했는데, 그때 작품에서 ‘내 것’을 발견했어요. ‘나는 이미 된 놈이었다’고 느꼈어요. 너무 감동했어요. 나무를 통해 나오니 봐줄 만했어요. 몸을 굴려 나무를 깎는 게 내게 맞는 것 같아요.” 34살 때였다.
그는 자기 시간의 10%도 판화 작업에 쓰지 않는다고 했다. “광화문광장에 곧 쌍용 해고 노동자들이 들어옵니다. 그들이 머물 곳을 마련해야 합니다.” 광장의 세월호 단체 시설물도 그의 손을 거쳤다. 이순신 동상 앞 ‘박근혜·이재용·정몽구 조형물’ 채색도 그가 했다. 예술인들이 블랙리스트 버스를 타고 세종시로 끌고 갈 김기춘·조윤선 조형물의 채색도 맡았다. 거제에선 파견 미술가들과 함께 8m 길이의 바퀴 달린 배 ‘고용안정호’를 만들었다.
‘사회운동가냐 예술가냐’는 질문에 답은 명쾌했다. “전 예술가입니다. 예술가로 노동자에게 가는 것이죠. 미술의 힘이 있어요. 미술팀이 가면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관심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집회는 쪽수가 중요합니다. 미술은 (집회 참가자의) 쪽수를 부풀리는 힘이 있어요. 예술이 그렇게 쓰일 때 잘 쓰이는 것이죠. 미술의 힘을 경험한 노동자들은 (파견 미술가에 대한) 대우가 달라져요. 매우 친근하게 느낍니다.”
자기만의 작품에 좀더 집중하고 싶은 욕망은 없을까? “용산 때 현장 예술가들과 더불어 ‘소모되고 있다’는 그런 얘기를 좀 했었죠. 지금은 그런 고민과 멀어졌어요.” 왜? “(이곳에서) 내가 즐거워요. 내가 즐거우면 아내도 즐겁죠. 난 강아지 같은 놈입니다. 즐거운 일을 쫓아다니죠.” 그는 18개월 된 아들을 두고 있다. 외박이 잦아 아내가 싫어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괜찮아요. 아내도 외박이 잦아요. 하하”라고 답한다.
이런 말도 했다. “글로벌 세상이니 작가주의로 나가 작업의 조형성을 높이면 미국에서 먹힐 수 있다는 애기도 주변에서 많이 해요. 멍청한 생각입니다. 예술은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이죠. 진실을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예술 감상의 밑자리에 있습니다. 저 역시 전시장에 가면 매력적이고 쇼크한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그렇지 않으면 기분이 더러워요.”
그는 목판작업 때 종이나 물감, 찍는 방법 등을 계속 바꾼다. 똑같은 방식은 지겨워서다. “머릿속으로 작업의 결과물이 그려지면 (그 방식은) 피해갑니다. 다른 방식을 택하죠. 그래서 제 작업은 늘 초짜 같지요. (작품에) 압정 자국이 있다고 개쪽을 당하기도 했어요.” 촛불정국에서 예술이 시민을 못따라가고 있다는 얘기도 했다. “지금 광장은 (국민의) 90% 이상 지지를 받고 있어요. 작가에겐 이런 기회가 없다고 생각해요. (촛불 시민들에게) 자기 작품을 보여주고 더불어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이죠. 참여미술이 쭉 이어져왔다면 (지금) 폭발했을 겁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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