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혜중공업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아트선재센터 2층 전시장 모습. ‘삼성의 뜻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란 모토 아래 한국인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함께 하는 삼성과의 질긴 인연을 랩송하듯 털어놓는 문장들이 영화 <고질라> 영상과 함께 쏟아져나온다.
‘삼성’!
10여년전 그들은 당시 작가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던 이 주제어를 웹상에 난사하며 한국 미술판에 쾌감을 안겼다. ‘삼성은 쾌락을 느끼는 것이다’, ‘삼성은 내 사랑, 죽음으로부터 나를 구해주리라 믿는다’는 구호를 내걸었던 그들. 2004년 삼성미술관의 로댕갤러리에서 인터넷 웹아트 풍자쇼를 벌였던 작가 장영혜씨와 그의 미국인 남편 마크 보주. 묵직한 어감과 달리 따발총 같은 웹 문장들의 가벼운 수다로 삼성공화국을 풍자, 고발했던 부부 작가그룹, ‘장영혜 중공업’. 그들이 신작을 갖고 새해 돌아왔다.
6일부터 서울 북촌 아트선재센터 1~3층에서 선보이고 있는 그들의 개인전 신작들은 가족과 삼성, 그리고 정치인들을 겨냥한 독설과 요란한 음악, 모호한 영상으로 범벅되어 있다. 건물 뒷벽에는 ‘삼성의 뜻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전시 구호를 인쇄한 총천연색 대형 배너도 나붙었다. 2000년, 지금은 가장 권위있는 한국 현대미술상이 된 에르메스코리아미술상의 초대 수상자로 뽑히면서 그들이 본격적으로 국내에 알린 웹사이트 문자예술, 이른바 웹아트의 포스트모던한 형식은 그닥 변하지 않았다. 웹의 가상 환경에 올려진 자극적이고 속어 일색인 문장 텍스트와 요란한 타악·재즈 음악, 짜깁기 영상들을 ‘와장창’ 뒤섞어 날선 풍자, 욕설, 절규 등을 쏟아내는 예의 방식 그대로다. 다만, 최순실 국정농단사태 와중에서 벌어진 정경유착의 실상, 특히 이재용 후계체제의 삼성을 보는 여론이 전에 없이 싸늘해진 현재 시국이 작품을 보는 뜻밖의 양념 구실을 해준다.
2층의 대표작 영상을 본다. 일본 괴수영화 <고질라>의 모호하게 확대된 영상이 옆에 함께 놓이면서 삼성의 제품과 서비스로 평생을 보내는 한국인 이야기가 독백처럼 흘러간다. ‘축하해요! 삼성병원에서 태어났군요’를 시작으로 유치원, 초중고, 대학, 입사, 결혼, 출산, 퇴직까지 대부분 삼성에 속한 학교, 직장, 제품, 서비스를 함께 한다는 이야기들이 쉬지않고 이어진다. 퇴직해 노후 생활을 하다 삼성보험에 든 자녀의 배려로 삼성병원 입원실에서 숨을 거두고 삼성공원의 묘지에 안치되고 ‘삼성기중기가 당신이 무덤을 조성할 땅을 판다’는 말로 문장의 흐름은 마무리되고 <고질라>의 흐릿한 영상이 어느정도 이어지다 작품은 끝난다.
장영혜중공업 개인전이 마련된 서울 북촌 선재아트센터 뒷면 벽에 나붙은 배너 작품. ‘삼성의 뜻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란 총천연색 문구가 반삼성 시위대의 선전 플래카드를 떠올리게 한다.
여러모로 작품들은 10여년전 전시의 변형된 복제판에 가깝다. 주방의 삼성 가전제품에 둘러싸인 주부가 삼성에 자신을 맡기며 오르가즘 같은 쾌락이 와닿았다는 환영, 그 쾌락을 맛보고 싶어 삼성 소비자 센터에 쾌락의 노하우를 묻는다고 했던 과거 독백의 형식, 얼개와 텍스트의 의미, 전개 과정이 엇비슷하게 변주된다. 백발을 검은 머리칼로 물들이며 거짓을 감춘 정치인들을 반욕설조의 말투로 비웃고 그들을 계속 뽑는 우리들의 바보스러움을 한탄하는 3층의 ‘정치인’ 작업, 가족모임이 사업자금을 둘러싼 동생과 형의 다툼으로 결국 젓가락을 면상에 휘두르며 싸우는 난장판이 되는 풍경을 글로 담은 1층 ‘가족’ 작업도 비슷한 흐름과 얼개로 풀려간다.
장영혜중공업은 광화문의 텐트 예술가들처럼 부당한 권력과 직접 맞서는 현장 투쟁가들은 아니다. 그들은 웹 텍스트 자체의 경쾌, 경박한 매체적 성격과 개념미술, 미디어아트의 잡종된 형식을 통해, 현실 자체를 현대미술의 유력한 재료로 요리해왔다. 현장 투쟁의 진정성이 어차피 담보되지 않는다면, 그들이 과거 ‘사랑’하고 ‘좋아한다’고 털어놨던 자본과 권력, 삼성을 얼마나 새로운 형식과 이야기로 작업 속에서 ‘데리고 노느냐’가 신작들의 성취를 받쳐주는 열쇠일 터다. 분명한 건 지금 나온 그들의 텍스트와 영상물들이 과거 전시에 비해 별다르게 읽히는 재미가 없고 심드렁한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이재용 부회장의 삼성이 수년전부터 비선실세 최순실씨를 미리 알아보고 딸 정유라씨의 말 구입비, 생활비 등을 대주면서 후계체제 승계를 도모하다가 16일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까지 청구된 엽기 드라마적 현실 앞에서 장영혜중공업의 삼성텍스트 신작들은 진부하고 왜소한 말놀이에 머물고있다. 작품을 압도하는 ‘헬조선’의 초강력한 현실 앞에서 신작을 보고 그들의 왕성했던 과거 상상력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기 때문이다. 3월12일까지. (02)739-7098.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