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시, 꽁시 2017’전에 나온 조선족 유학생 작가 최명씨의 설치작품. 잣대를 상징하는 거대한 자 아래 풀어헤쳐진 여행가방이 항상 이방인의 정체성을 안고 작업해야 하는 국내 조선족 예술가들의 고뇌를 드러낸다.
“336번 성형외과 많은 곳.” “233번 조선족들 많이 사는 곳.” “239번 한국 젊은이들 많은 곳.” “425번 알파문구(물감상점)가 있는 곳.”
무슨 암호풀이 같다. 이 숫자는 서울시내 지하철역 번호들이다. 336번은 압구정역, 233번은 대림역, 239번은 홍대입구역, 425번은 회현역이다. 연변 출신 조선족 작가 신광(37)씨가 만든 웹아트 작품 ‘인상서울-지하철노선도’에서 보고 들을 수 있는 설명은 이런 식이다. 컴퓨터 영상화면에 뜬 서울지하철 노선도의 주요 역번호들을 클릭하면 작가가 연변식 말투로 해당 역의 장소에 얽힌 자신의 기억을 무뚝뚝하게 이야기한다.
한국에 유학 온 지 10년이 지난 그가 여전히 낯선 역 이름보다 번호를 중심으로 한국 공간에서의 삶을 연상하고, 펼쳐나간다. 이 독특한 상황을 관객은 그의 육성을 클릭하며 짐작하게 된다. 성균관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작가는 “조선족은 외국인이어서 작가공모전과 입주작업(레지던시) 지원에 제약을 받는다. 차별은 아니지만 조선족 작가로 무언가 권리를 요구하기도 힘들고 작가활동 하기에 좋은 조건은 아니다”라고 털어놓았다.
요즘 서울 연희동 주택가 들머리의 복합문화공간 보스토크에서는 신씨를 비롯한 조선족 청년 미술가와 국내 작가들이 의기투합해 발랄하면서도 심란한 현대미술 난장을 펼쳐놓고 있다. 17일 조선족 기획자 정금령, 김진씨의 손길로 개막한 ‘꽁시, 꽁시 2017’이란 기획전이다. 온라인 미술정보웹진 네오룩이 판을 차린 이 전시는 ‘벗들의 힘’(朋友的力量)이란 부제처럼, 현재 국내 활동중인 젊은 조선족·중국 작가 12명이 저마다 한국 지인 작가를 1명씩 초대해 모두 24명이 작품을 내놓았다. 전시제목 ‘꽁시’(恭喜·궁시)는 “축하하다”는 뜻의 중국말. 새해 인사로 주로 쓰이며 흔히 두 번 반복하는 ‘쌍’(?)의 형태로 쓰는데, 전시형식은 바로 이런 점에 착안한 것이다.
회화, 조소, 도예, 디자인, 사진, 영상, 설치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두루 나온 전시장은 국내 조선족, 중국 작가들이 한국에서 어떤 작업을 하고, 한국의 미술인들과 어떻게 어울리며 생각을 공유하는지를 어렴풋이 보여준다. ‘잣대’를 화두 삼아 거대한 눈금자를 벽면에 걸쳐놓고 그 아래 책과 옷들이 들어찬 여행가방을 풀어헤쳐 놓은 조선족 유학생 최명 작가의 작품은 그들이 여전히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을 감내하면서 또다른 모국 한국에서 나름의 미술언어를 고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 쪽 미술 하면 정밀한 리얼리즘이나 거칠고 날선 화면의 표현주의적 작품들을 주로 연상하게 되지만, 이들의 작업은 동시대 한국 청년작가들의 작업과 비슷한 흐름을 견지하면서도 한·중 미술판에서 안정적으로 작업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갈망을 드러낸다. 여러 겹의 구명튜브를 쌓아놓고 존재의 안전에 대한 과잉감각을 이야기하는 황호빈씨의 설치작업 ‘튜브슈트’에서 그런 바람이 읽힌다. 2월5일까지. (02)337-5805.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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