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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내 조각품 욕먹는 것 보면서 난 ‘복받은 작가’란 생각”

등록 2017-01-23 19:38수정 2017-01-24 13:34

박근혜·이재용 등 다섯 인물상 제작
촛불행진때 대열 맨 앞…파손 수난도
“박근혜 얼굴 비대칭 등 나름의 실험
김기춘은 불필요하게 질 높단 얘기도”

천재 조각가 구본주의 마지막 제자
대추리부터 ‘현장의 미술가’로 살아

광장의 조각가, 나규환 작가

나규환 조각가가 자신이 깎은 인물상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먹물을 뒤집어쓴 조윤선상과 김기춘, 정몽구상이 보인다. 조윤선, 김기춘상을 두고는 “불필요하게 고퀄리티를 추구했다”는 지적을 받았다고 한다.
나규환 조각가가 자신이 깎은 인물상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먹물을 뒤집어쓴 조윤선상과 김기춘, 정몽구상이 보인다. 조윤선, 김기춘상을 두고는 “불필요하게 고퀄리티를 추구했다”는 지적을 받았다고 한다.

서울 광화문광장을 찾는 외국인들이 요즘 꼭 하는 일이 있다. 이순신 동상 앞에서 ‘박근혜, 이재용, 정몽구, 김기춘, 조윤선’ 조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신기하다는 표정이다. 이 스티로폼 상을 깎은 이는 나규환(37) 조각가다. 지난 17일 오전 광화문광장에서 그를 만났다. 인터뷰 뒤 그는 다음 작업을 위해 바삐 삼성전자 본사가 있는 강남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농성 중인 삼성 백혈병 피해자 가족들을 돕는 활동가를 만나기 위해서다. “백혈병 문제가 아직 해결이 안 됐더라고요. 가족들에게 힘이 될 수 있도록 조각상을 만들려고 합니다.”

“박근혜는 4일, 이재용·정몽구는 합해서 3일이 걸렸죠.” ‘불필요하게 고퀄리티(높은 완성도)를 추구했다’는 평가를 받은 ‘김기춘, 조윤선’은 합해서 열흘이 걸렸단다. 작품 수준을 자평해달라고 했더니 “맘에 들어요. 절묘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5명 모두 제 나름의 실험을 했어요. 박근혜 얼굴상은 일부러 비대칭을 추구했어요. 보통은 대칭인데 거기서 벗어난 거죠. 비대칭이면서 자연스럽게 된 것 같아요. 조윤선, 김기춘은 일부러 인물 초상 조각같이 깎았어요.”

‘조윤선’은 세종시에서 먹물을 뒤집어썼다. ‘박근혜’의 목엔 대형 주사기가 꽂혀 있다. “제가 포천 작업실에서 스티로폼을 깎았고, 채색은 이윤엽 판화가 주도로 저를 포함해 5명이 했어요. 주사기가 꽂힌 건 저도 뒤늦게 봤어요. 먹물도 그렇고, 불편하죠.” 욕먹을 일을 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목에 주사기까지 꽂을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다는 것이다. 한편에선 “내가 복을 받고 있다”는 생각도 하고 있단다. “시민들이 평화의 소녀상에 목도리나 모자를 씌우는 것처럼, 제 작품이 광장의 언어를 먹으며 계속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칭찬이든 욕이든 저의 예술이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가고 있음을 확인할 때 너무 기분이 좋아요. 소녀상은 사랑을 먹지만 제 작품은 욕을 먹죠. 하하.”

그의 작품은 주말 촛불 행진 때 대열의 선두에 선다. 트럭에 실려 문화체육관광부 청사가 있는 세종시와 국회가 있는 여의도에도 다녀왔다. “여의도에서 어버이연합 회원분들이 (박근혜상을) 부수려고 하면서 (상) 입술이 터졌어요. ‘이재용’은 목이 떨어져 다시 붙였죠.”

그는 2006년 대추리 때부터 민중생존권 투쟁 현장이라면 늘 달려갔다. 이른바 파견미술가다. 그를 지금의 나규환과 연결시켜준 이는 교통사고로 일찍 세상을 뜬 천재 조각가 구본주(1967~2003)다. 구 작가와 그를 연결시켜준 이는 경기 포천에서 지금도 핸드폰 가게를 하고 있는 어머니다. “제가 군에 있을때 구 작가가 핸드폰 가게에 들렀어요. 손님이 조각가란 걸 알고 어머니가 ‘조각해서 먹고살 수 있느냐’ 등 꼬치꼬치 묻다 작가의 명함을 받아놓았죠.” 홍익대 조소과 1년을 마친 뒤 입대한 그는 제대 뒤인 2003년 초 어머니가 건네준 명함을 들고 구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촌스런 누드 조각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세련된 조각을 할 수 있다’는 구 작가의 얘기에 감명받아 ‘제자’가 되길 청했다. 구 작가의 생애 마지막 6개월 동안 작가의 작업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어느날 구 작가가 <노동의 새벽>(박노해)이란 시집을 줬어요. 깜짝 놀랐어요. 지금도 그 시집을 봅니다. 대학에 들어가 제가 찾아헤맸던 자유란 게 바로 이런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죠.”

그는 3수 끝에 2000년 홍대 조소과에 들어갔다. “학교를 굉장히 열심히 다녔다”는데도, 4학기 연속 학사경고를 받고 제적당했다. “선배들이 그래요. 너 참 재주가 훌륭하다, 일부러 잘리기도 힘들다고요.” 설명을 더 들었다. “교수가 자유에 대해 표현해보라고 합니다. 해변가에서 머리 휘날리며 누드로 달리는 이미지를 생각하다가 이게 진짜일까 의심했어요. 그래서 다른 것은 없을까, 도서관에서 책을 보기도 했어요.” ‘진짜’를 찾아헤매다, 대학 커리큘럼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실에 답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지금의 저는 그 결대로 살아온 결과이겠죠. 전 눈치가 없는 편입니다.”

스승이 죽은 뒤 예술가의 법적 지위와 정년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 삼성화재 쪽과 고된 싸움을 했다. 이때 민중미술과 인연을 맺게 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용산 때 조각품인 ‘끝’이다. “망루에 올라 투쟁하려 했던 이들의 마음을 담으려 했어요. 이렇게 투쟁하는 사람이 이 사람들뿐인가, 그런 마음으로 작업을 했어요.”

개인전은 딱 한 차례 했다. 그때 전시 주제가 ‘인간’이다. “두번째 개인전도 타이틀은 인간이 될 것 같아요.”

‘파견미술’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전통적 구상 작업도 하고 싶고, 새로운 형식의 미술에 대한 욕망도 있죠. 작업실을 벗어나 대중, 민중과 소통하는 방식은 후자에 속하겠죠. 몸이 어디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곳에서 나의 상상력이 출발하니까요.”

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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