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강변 문호리 리버마켓에 있는 발달장애인 화가 은혜의 텐트. 값싼 흰색 나일론으로 만들어졌지만, 뒤쪽의 겨울나무들이 수호해주는 우아한 성전처럼, 황홀한 갤러리처럼 보였다. 은혜 갤러리, 2017년 2월, 펜, 33.5×24.5㎝
지난 주말, 경기도 양평 북한강변의 문호리 리버마켓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캐리커처를 그려 팔고 있다는, 만화가 장차현실의 딸 은혜가 궁금해서였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북한강 강줄기를 따라 펼쳐진 200여개의 텐트에는 아침부터 사람들이 북적댔다. 양초, 한복, 떡, 그릇…. 손으로 직접 만든 것들만 팔고 사는 정겨운 마켓.
은혜의 텐트 ‘니얼굴’에도 캐리커처를 그려 받겠다는 사람들이 일찌감치 줄을 이었다. 텐트 밖에 걸려 있는 은혜의 그림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사람들은 자석에 이끌린 듯 안으로 쑥쑥 들어선다. 어린이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연인들, 가족들…. “인상이 아주 좋군요!” “아주 멋지군요!” 척척 덕담을 해가며 손님들의 얼굴을 연필로 열심히 그려내는 은혜. 추운 날씨 탓에 옆에 들여놓은 석유난로에 몸을 살살 녹여가며, 그리고 또 그린다. 그림 값은 1장에 8천원. 지난해 8월부터 이 텐트에서 은혜가 그려낸 얼굴은 700명을 넘었다. 예쁘거나, 꼭 닮게 그려주는 일은 잘 없어, 그림을 받아들고 짜증난 얼굴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은혜가 그려내는 선은 신기하게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발달장애인이라서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선을 뽑아낼 수 있는 걸까? ‘니얼굴’이라는 말이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네가 더 심해!’ ‘너나 잘해!’라는 뜻으로 쓰이는 은어라는데, 그 사람 속의 진짜 얼굴을 까발리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걸까? 한마디로 ‘니얼굴’ 그림들은 고혹적이다.
은혜가 그린 그림들. 7개월 만에 하나하나 다른 700여명의 얼굴을 그려낸 은혜. ‘은혜 만인보’를 거뜬히 그려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은혜, 2016~2017년, 연필, 21×29.7㎝
나는 저만큼쯤 떨어져 앉아 은혜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뒤쪽으로 벌거벗은 겨울나무들이 전사들처럼 은혜의 텐트를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었다. 하늘 중간을 넘어선 태양이 길쭉한 텐트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시간이었다. 텐트 밖에 걸린 은혜의 그림들이 봄기운 머금은 바람에, 팔랑팔랑 날렸다. 순간, 흔해빠진 흰색 나일론 텐트가 은혜만의 아름답고 황홀한 갤러리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 속에 앉아 그림 그리는 은혜는 ‘성스러운 마녀 화가’다. 북한강변 강물 흘러가는 소리 들으며, 북적대며 지나다니는 사람들 이야기 들으며, 자신만의 텐트 갤러리에서 그림을 그려 보여주고 파는 은혜. 진짜배기 화가였다.
북한강변 은혜의 텐트 갤러리는
거만해지려는 내 마음에
귀싸대기를 한 방 세게 날려주었다
25년 전쯤이다. 은혜의 엄마인 장차현실과 나는 30대 만화가와 신문기자로 처음 만났다. <한겨레>에 삽화를 그리던 장차현실은 누가 봐도 다운증후군인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딸 은혜를 씩씩하게 데리고 다녔다. 장애인 자녀를 공공장소에 데리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기사거리가 되던 시절. 그들의 이야기를 기사화하면서 은혜와도 친해졌다. 20여년을 훌쩍 넘어, 그 은혜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우연히도 내가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그림 그리기 시작한 시기와, 은혜가 그림 그리기 시작한 시기가 꼭 맞물렸다. 우리는 닮은 점이 더 있다.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점,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리며 산다는 점, 주로 집 밖에서 그린다는 점. 은혜와 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림의 세계로 겁 없이 뛰어들었다.
처음 그림 그리며 살기로 결심했을 때, 꼭 갤러리에서만 그림을 팔 생각은 아니었다. 노점상처럼, 길거리에 앉아 그리면서 팔기도 할 참이었다. 그런데 두 번의 갤러리 전시를 하고, 꽤 팔리기도 하면서, 길거리에서 그림 그려 파는 일은 좀 ‘쪽팔린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기 시작했다. ‘혹시 어떤 갤러리가 초청 전시회를 기획해 주지 않나?’ 하는 욕심까지. 북한강변 은혜의 텐트 갤러리, ‘니얼굴’은 거만해지려는 내 마음에 귀싸대기를 한 방 세게 날려주었다. 무면허 화가, 동네 화가, 옥상 화가, 길거리 화가…. 내 이름 앞에 붙어가는 이름들에 취한, 어설픈 내 마음에 말이다. 봄, 가을 꽃이 활짝 필 때 ‘제 손을 잡고 원하는 꽃에게로 데려가 주세요. 제가 멋지게 그려드릴게요!’ 이름을 내건, 길거리 꽃그림 노점상을 펼쳐볼까 싶기도 하다. 푸드트럭처럼 ‘미갱이 그림트럭’을 운전하며, 그리며, 팔며, 전국을 돌아다녀볼까? 뭉게뭉게 새로운 꿈이 펼쳐진다.
일단, 7개월 만에 700명의 얼굴을 그려낸 은혜의 뚝심을 생각하며 더 열심히 그려야겠다. 처음 만날 때 세살배기 다운증후군 어린아이였던 은혜는 지금 이 순간 내 최고의 그림 라이벌이 됐다.
▶ 김미경 27년간 직장생활을 하다, 쉰네살이 되던 2014년 전업 화가를 선언했다. 서촌 옥상과 길거리에서 동네 풍광을 펜으로 그려 먹고살고 있다.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스스로 성장해가는 화가다. 전시회 ‘서촌 오후 4시’(2015년)와 ‘서촌꽃밭’(2015년)을 열었다. 각박한 현실에서 꿈을 접고 사는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꿈을 향해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다. 자신이 사는 동네를 그려낸 따뜻한 작품과 그 뒷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꿈을 향한 각자의 발걸음이 더 빨라질 듯싶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