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아 출신의 작가 호정과 스페인 사진가 브루노의 협업작품중 하나인 ‘어머니의 삼위일체’. 뇌졸중으로 쓰러져 말을 못하게 된 생모와 대면하면서 느낀 충격과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들을 여러 가면을 쓰거나 들고있는 작가 자신의 모습으로 표출해냈다.
39년만에 딸이 만나러 왔는데, 엄마는 한마디 말도 못했다. 10여년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반신불수가 되어 병상에 누운 엄마. 딸은 손 붙잡고 울며 엄마의 눈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가 나를 알아보았다는 것을. 그리고 나의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있던 무언가가 깨졌다는 것을.’
유럽에서 활동해온 입양아 출신 사진작가 호정(44)의 이 한스런 이야기가 모던한 사진 사모곡으로 풀려나왔다. 서울 인사동 갤러리 나우에 차린 스페인 동료사진가 브루노 피구에라스와 그의 협업사진전 ‘브로큰 홀’이다. 그의 첫 한국전인 이번 전시 출품작들은 2014년 친모와의 비극적인 만남을 모티브로 깔고 있다. 호정은 1975년 이탈리아에 사는 벨기에인 양부모에게 입양된 뒤 10대에 접어들자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요가와 불교 수행을 하며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주변 사람과 자기 생각은 모두 서양인데 왜 가면처럼, 덫처럼 아시아인의 얼굴을 하고 있을까란 고민이 엄습했다. 정체성 붕괴에 직면한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뿌리를 찾아 2014년 브루노와 한국으로 왔다. 수소문해 찾은 생모는 1998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다.
“벽에 맞닥뜨린 느낌이었어요. 한동안 어머니처럼 말 잃고 잠만 자다 동료 브루노가 사진작업을 통해 치유 과정을 만들어보자고 했지요. 몸과 사물이 어우러진 내 마음 속 내면과 생각들을 갖고 컨셉트를 내면 브루노가 사진을 찍고 시각적으로 구현했어요. 작업들은 침묵 속에 이뤄졌지요. 그건 어머니께 목소리를 돌려드리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호정의 말대로, 전시장 사진들은 사람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것, 교감과 공유·치유에 대한 간절한 갈망의 작동을 이미지로 표출한다. 벗은 호정의 몸을 중심으로 접시, 사다리, 댕기, 가위, 젓가락, 가면 등의 소품들이 얽히며 구성되는 이 작품들은 입양아 문제 하면 떠올리게 마련인 다큐사진 장르와는 전혀 다른 감각과 구도로 입양아의 내면을 더듬어간다. 호정 자신이 어머니와의 만남 이후 느낀 아픔과 서양 사회에서 살며 느꼈던 정체성이 깨어지는 과정들이 모더니즘적인 몸과 사물들의 구성으로 나타난다. 존재에 대한 솔직한 탐구의 욕망이 사다리를 올라가거나 탁자 밑에 숨거나 가면을 쓴 몸의 움직임과 소품이 결합된 짜임새를 통해 눈에 들어온다는 점이 돋보인다.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문화적 이민>은 탁자의 접시 위에 머리만을 디밀고 얼굴을 배경으로 왼손에 든 젓가락 끝과 포크에 붙인 자신의 어릴적 사진을 직각으로 맞붙여놓은 사진이다. 입양아의 고뇌에 대한 직설적 토로가 아니라 이지적 탐색에 가까운 구성적 작품이다. 20~30년대 바우하우스 풍의 모더니즘 회화처럼 이질적 요소들간의 정연한 조합을 통해 그는 자신의 마음과 육체를 해체하듯 투시하면서 치유와 교감의 몸짓을 보낸다.
전시장에 나온 호정 작가(왼쪽)와 브루노 작가 커플. 그들 뒤로 모더니즘적인 화면 구성이 돋보이는 출품작 ‘문화적 이주’가 내걸려있다.
전시장 입구엔 아이들 옷과 영어, 한국어 불경이 얽혀 빨래처럼 내걸린 설치작업도 있다. 바람결에 펄럭이는 천조각들에 소망을 날려보내는 티베트 습속에서 영감을 얻어 세상 입양아들과 그들의 친모에게 바치는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이번 작업들을 토대로 인간과 사물의 존재 이면을 탐색하는 거대한 후속 작업을 꿈꾼다는 호정 작가는 지난 2일 전시장에서 나긋한 말투로 관객들에게 말했다. “제가 나오는 작품들에 대해 여러분들이 각기 다른 생각과 흥미를 갖고 궁금해하길 바래요. 그래서 전시장에 들어왔을 때와 나갔을 때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기를.” 14일까지. (02)725-2930.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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