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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 봄의 교향곡’ 연주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등록 2017-03-10 20:12수정 2017-03-10 21:09

[토요판] 김미경의 그림나무
(5) 헌법재판소의 봄
인기를 얻었던 티브이엔(tvN) 드라마 <도깨비>에서 도깨비가 죽으며 하던 말 “비로 올게, 첫눈으로 올게”를 “목련으로 올게, 하품으로 올게”로 살짝 바꿔 넣어봤다. 목련 몽우리로, 하품으로 오고 있는 봄. 헌법재판소 봄의 교향곡, 2017년 3월, 펜, 24.5×33.5㎝
인기를 얻었던 티브이엔(tvN) 드라마 <도깨비>에서 도깨비가 죽으며 하던 말 “비로 올게, 첫눈으로 올게”를 “목련으로 올게, 하품으로 올게”로 살짝 바꿔 넣어봤다. 목련 몽우리로, 하품으로 오고 있는 봄. 헌법재판소 봄의 교향곡, 2017년 3월, 펜, 24.5×33.5㎝
헌법재판소 주변을 며칠째 맴돌았다. 주말 촛불시위에 참여해, 헌법재판소 근처까지 따라가 구호를 외쳐보기도 하고, 카페 2층에서 커피를 마시며 헌법재판소 마당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기도 했다. 태극기파와 촛불파가 맞서 있는 헌법재판소 정문 앞에 한참 동안이나 우두커니 서 있어도 봤다. ‘촛불로 둘러싸인 헌법재판소 건물을 그려볼까?’, ‘광화문광장에서 헌법재판소 가는 길을 그려볼까?’ 탄핵과 관련해 뭔가를 그려보고 싶었다.

헌법재판소 담 안쪽에 있는 목련나무 몇 그루를 발견했다. 멀리서 볼 땐 앙상한 가지뿐이었지만,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니 수백개의 목련꽃 몽우리들이 물이 올라 곧 터질 듯한 모양새다. 세상으로 나오기 직전의 몽우리 속 부산한 몸짓들이 눈에 선하다. 봄비 몇 번 내리면 황홀한 꽃잎들을 선보이겠지. 꽃잎이 벌어지지 않아 아직 심심한 풍경이었지만, 뭔가 좋은 일이 곧 터질 듯한 예감. 담에서 좀 떨어진 자리에, 준비해 간 낚시 의자를 놓고 앉아 그리기 시작했다.

헌법재판소 담 밖을 지키고 서 있던 앳된 얼굴의 경찰이 ‘저 나이든 여자가 길거리에 앉아 뭘 하는 거야?’ 싶은지 자꾸 힐끗힐끗 쳐다본다. 모른 척 한참 그리는데, 이 경찰이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기 시작한다. 어리고 고운 얼굴이 하품 때문에 다 망가져버린다. 푸하하하. ‘그러게. 몇 시간씩 앞만 바라보며 헌법재판소 담을 지키고 서 있자니 얼마나 지루할까?’, ‘아니지, 헌법재판소 앞에 와서 찬송가 부르고, 108배 하고, 서로 싸우는 사람들까지 있으니 참말 하품이 절로 나올 일이지!’ 속으로 혼자 구시렁대며 그리고 있었다. 아, 그런데 이 경찰이 하품을 너무 많이 해대는 게다. ‘근무 중에 저건 좀 지나친 거 아냐?’ 싶은 순간, 재미난 생각이 떠올랐다. 터질 듯한 목련 몽우리와 입이 찢어질 듯한 경찰의 하품. 뭔가 예사롭지 않은 조합이다.

건너편 헌법재판소 건물
어느 창문 안에선가
법률적 봄이 준비되고 있었겠지

옥상카페의 허브 화분. 허브잎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더 치밀하게 그려낼수록 봄볕이 더 따스하게 다가왔다. 봄볕2, 2017년 2월, 펜, 15×15㎝
옥상카페의 허브 화분. 허브잎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더 치밀하게 그려낼수록 봄볕이 더 따스하게 다가왔다. 봄볕2, 2017년 2월, 펜, 15×15㎝
그림을 그리면서 늘 ‘비 오는 날을 어떻게 그리지?’, ‘바람 부는 날을 보여주는 방법은 뭘까?’, ‘사랑은 어떻게 그릴까?’, ‘봄은 무엇으로 표현할까?’를 궁리한다. 아직은 보이는 것들만 열심히 그릴 뿐이지만, 그런 것들도 그려보고 싶은 맘이 굴뚝같다. 유독 더 춥고, 더 길게 느껴진 올겨울. 따뜻한 봄을 앞당겨 그려보고 싶었다. 좀 이른 시간에, 늘 나가 앉아 그리던 옥상카페 같은 자리에 나간 날이었다. 카페 소파와 테이블에 강렬한 그림자들이 드리워져, 전날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같은 장소인데, 그 전날들과는 달리 완연한 봄기운이 느껴졌다. 그림자 때문이었다. 멀리서 다가오는 봄볕이 만들어낸 그림자. 그림자를 더 진하게 칠할수록, 봄볕은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더 진하게 그리면 봄이 더 빨리 올 것 같은 마음으로 자꾸자꾸 그림자를 그렸었다.

아직 추웠던 2월 어느 옥상카페에서의 아침. 그림자를 진하게 그리면 그릴수록 봄볕이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봄볕1, 2017년 2월, 펜, 15×15㎝
아직 추웠던 2월 어느 옥상카페에서의 아침. 그림자를 진하게 그리면 그릴수록 봄볕이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봄볕1, 2017년 2월, 펜, 15×15㎝
헌법재판소 담벼락을 배경으로 물오른 목련나무만 그리려던 생각을 접고, 하품하던 경찰을 그림 속에 집어넣기로 했다. ‘보초 서는 게 지루해서, 시위대를 쳐다보는 게 따분해서만 하품을 하는 게 아냐! 온몸을 나른하게 만드는 봄기운 탓에 터져 나오는 하품을 주체할 수 없는 게야!’ 경찰의 하품을 맹렬하게 그릴수록, 봄볕을 더 강렬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렁차게 하품하는 모습을 기억해 그릴 재주는 없어, 그 앞 카페로 자리를 옮겨 앉아, 사진기를 들고 창문 밖을 훔쳐보며 기다렸다. ‘하품해라~ 하품해라~’ 드디어 다시 하품! 찰칵!

헌법재판소를 둘러싼 강력한 봄의 작동! 모두들 열정적으로 기다리는 봄의 작동이다. 건너편 헌법재판소 건물 어느 창문 안에선가 법률적 봄이 준비되고 있었겠지. 평의를 했음 직한 사무실의 창문도 살살 펜으로 칠해봤다. 어느 새 수백개의 목련꽃 몽우리들과, 그 옆 나뭇가지 속에서 준비되고 있을 연둣빛 잎사귀들과, 경찰의 입 찢어지는 하품이 함께하는, 아주 모던한 ‘헌법재판소 봄의 교향곡’ 연주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자꾸자꾸 그리다 보니 경찰도 하품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헌법재판소 봄의 교향곡’을 목청껏 부르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 김미경 27년간 직장생활을 하다, 쉰네살이 되던 2014년 전업 화가를 선언했다. 서촌 옥상과 길거리에서 동네 풍광을 펜으로 그려 먹고살고 있다.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스스로 성장해가는 화가다. 전시회 ‘서촌 오후 4시’(2015년)와 ‘서촌꽃밭’(2015년)을 열었다. 각박한 현실에서 꿈을 접고 사는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꿈을 향해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다. 자신이 사는 동네를 그려낸 따뜻한 작품과 그 뒷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꿈을 향한 각자의 발걸음이 더 빨라질 듯싶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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