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아신트의 무덤에서 발견된 조상에 영감을 받아 그린 존 버저의 드로잉. <벤투의 스케치북>에 실렸다.
“드로잉을 할 때는 대상을 통과해 지나간다…드로잉은 어떤 사건을 발견해가는 자전적인 기록이다.”
지난 시절 숱한 예술학도와 애호가들의 심금을 울렸던 거장의 생각과 관찰이 녹아든 드로잉들이 날아왔다. 자신을 “그저 빈곳을 메우는 사람 정도”라고 털어놓았던 영국의 비평거장 존 버저(존 버거:1926~2017)의 것이다. 프랑스 시골에서 평생 쓰고 그렸던 그의 드로잉, 글귀들은 지금 서울 창성동 서촌 골목 온그라운드 갤러리의 30평 공간 안에 머물고 있다.
올해 1월2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그를 기리기 위해 출판사 열화당이 차린 전시 ‘존 버거의 스케치북’은 세상의 구석진 것들에 대한 따듯하고 예민한 시선들로 촘촘하다. 1개의 홀과 2개의 방, 세 공간들을 연결하는 통로마다 섬약하고 세밀한 선으로 묘사한 꽃, 사람, 동물, 숲, 문, 스웨터 등의 드로잉 60여점과 명징한 글귀들이 나붙었다. 홀에서는 열화당이 그동안 출간한 버저의 모든 저술들도 볼 수 있다.
방에 들어가면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사유하며 느낀 것들을 옮긴 <벤투의 스케치북> 원화들이 기다린다. 책에 실린 인물·사물 드로잉 34점과 단상들은 찰진 사유와 감각의 힘을 내뿜고 있다. 렘브란트의 제자 빌렘 드로스트가 그린 연인 초상을 다시 드로잉하면서 버저는 한 남자에 대한 강렬한 욕망의 시선 자체를 발라낸다. 벨라스케스의 익살꾼 초상에서는 존재의 덧없음을 넘어선 어떤 경지를 읽어냈다고 하고, 손주에게 선물하려고 탁자에 놓은 스웨터를 스케치할 때는 그 스웨터가 두가지 종류의 따듯함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고 썼다. 두터운 양모를 입었을 때 아이가 느낄 따듯함과 아이 옷을 떠주는 이웃간의 전통에서 배어나오는 감정적 따듯함.
존 버저가 다시 옮겨 드로잉한 17세기 거장 렘브란트의 제자 빌렘 드로스트의 <여인 초상>. <벤투의 스케치북>에 실린 작품이다.
통로 안쪽에 있는 영국의 명배우 틸다 스윈턴과 버저의 4분여짜리 짧은 대담영상 <시간에 걸쳐>는 전편 보기를 권한다.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인간의 몸에 대한 사유를 언급한 구절들에 대한 틸다의 독백이 대화 사이로 스며들듯 이어지는 영상은 존재와 인연에 대한 심오한 명상록과 다를 바 없다. 버저는 틸다의 얼굴을 응시하며 초상화에 붓질을 하다가 둘의 생일이 11월5일로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긋한 목소리로 말한다. “중요한 건 우리가 서로 뭔가를 인식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다른 생애에서 서로 닿았을지 모르죠. 이 생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게 아닐까요. 오케이. 11월5일날 봐요.” 사후 국내에 나온 신간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의 마지막 글 ‘망각에 저항하는 법’의 친필원고에서 버저는 ‘말로 옮길 수 없고 딱히 우리를 향해 던져진 메시지도 아닌’ 자연의 외양을 텍스트로 읽어내는 것이 가능할까란 궁금증도 드러낸다. 영국 화가 저넷 윈터슨이 “화가가 물감을 다루듯 생각들을 다루었다”고 헌사를 바친 것처럼, 그는 다기한 성찰과 붓질로 세상 빈곳의 진실을 파고들며 알렸던 예술가였다. ‘말하지 않으면 말해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쓰고 그리기를 삶의 끝자락까지 게을리하지 않았던 한 인간의 품성과 정열, 의지가 전시장 곳곳에서 숯불처럼 피어오른다. 4월7일까지. 월 휴관. (02)720-8260, (031)955-7000.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열화당 제공